기사의 0번째 이미지 
레이쥔(雷軍·45) 샤오미(小米) 회장(CEO)은 지금 중국에서 가장 ‘핫’한 기업인이다. 마치 전성기의 스티브 잡스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샤오미 스마트폰이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중국의 스티브잡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 스스로도 은근히 그런 시선을 즐긴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 대형 스크린 앞에 선 채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일각에서 그에 대해 “스티브 잡스나 따라한다”며 비아냥거리는 이유다. 애플만큼 실력을 갖추지도 못한 주제에 겉멋만 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쥔이 일군 샤오미의 성공스토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오히려 20년 쯤 뒤에는 스티브 잡스가 ‘미국의 레이쥔’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게 많은 중국인들의 생각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중국 20~30대가 가장 좋아하는 스마트폰

‘샤오미’라는 스마트폰 브랜드가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중국에서는 20~30대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마트폰으로 부상했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중국 스마트폰 시장을 꽉 잡고 있는데 샤오미가 뭐가 대수냐고? 그럴 수도 있다. 애플에 대한 브랜드 인지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같은 스마트폰이라도 애플 제품은 가장 비싸게 팔린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돈이 좀 있고, 브랜드를 잘 따지는 세련된 고객들이 애플을 찾는다. 중국인들의 평균 소득 수준을 감안할 때 평범한 사람들이 애플을 갖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삼성전자는 애플 못지않은 좋은 품질에 가격이 애플보다 다소 저렴하다보니 브랜드를 따지면서도 실용적인 소비자들이 선호한다. 특히 아이폰의 라인업에는 없는 대화면 제품인 노트3는 상당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의 비즈니스맨들은 갤럭시를 좋아한다.

중국의 대다수 국민들, 그중에서도 부모덕을 못 보는 젊은 층들은 아이폰과 갤럭시를 구입하기가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다. 웬만한 중국의 대기업 신입사원들이 손에 쥐는 월 급여가 대략 4000위안(약 70만원) 전후인 점을 감안하면 한 달 치 급여를 전부 쏟아부어도 살 수 없는 수준이다. 레노버와 화웨이 등 중국 토종업체들이 내놓은 스마트폰이 저가를 무기로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고가품과 저가품으로 분화돼 있는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 지난 2010년 처음으로 샤오미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샤오미는 역사가 가장 짧은 스마트폰 업체다. 그러나 성장 속도가 무섭게 빠르다. 샤오미는 지난해 1870만대의 스마트폰을 팔았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160%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3분기에는 중국에서 510만대를 팔아 380만대에 그친 애플을 2개 분기 연속으로 앞서기도 했다. 지난해 4분기에는 시장점유율 6.4%로 중국 스마트폰 판매 순위 5위권에 들었다.

샤오미는 올해 4000만대 정도 판매를 예상한다. 지난해의 2배를 넘어서는 수치다. 설립된 지 이제 4년 정도 된 샤오미의 기업가치가 벌써부터 100억달러(약 10조6000억원)로 평가되는 배경이다.

이처럼 무서운 샤오미의 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레노버나 화웨이 같은 다른 토종 스마트폰에 비해서 단순히 품질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애플과 삼성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일까. 두 해석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샤오미의 최대 강점은 기존 스마트폰 업체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한 것에 있다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 덕분에 샤오미는 피 튀기는 스마트폰 전쟁에서 안정적으로 몸을 숨긴 채 화력을 뿜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샤오미는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스마트폰을 구매한 고객에게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잘 제공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 샤오미가 자체 운영하는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건수가 현재 누적으로 10억 건을 넘어섰다. 앱스토어를 지난 2012년 말부터 운영한 점을 감안하면 1년 남짓한 시간에 얻어낸 결과다.

중국에서 운영되는 200개 이상의 앱스토어 중에서 샤오미는 이미 ‘톱5’에 들었다. 더구나 새로운 앱을 개발할 때 고객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시장 요구에 맞추는 것이 샤오미의 강점이다.

얼마 전 레이쥔을 만난 자리에서 “샤오미가 다른 스마트폰 기업과 차별화되는 성공 비결이 뭐냐”고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인터넷 중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경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을 설계할 때부터 고객의 수요를 감안하고, 끊임없이 고객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면서 일을 진행한다. 직원들 모두가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신제품을 출시한 뒤에도 고객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하드웨어를 업데이트한다. 샤오미와 고객은 마치 친구 사이 같다. 스타와 팬의 관계처럼 고객들은 샤오미에 열광한다.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열혈 팬이 많은 것이 샤오미의 최대 강점이다.”

입소문 마케팅 4000만대 판매 예상

초창기 샤오미는 ‘짝퉁 애플’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레이 쥔 CEO는 샤오미가 애플과 전혀 다른 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솔직히 제품을 만드는 자세는 애플에 많이 가깝다. 하지만 제품 개발 방식이나 사업 모델은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아마존과 더 비슷하다”고 역설했다. 애플은 위에서 결정한 대로 따르는 톱다운 방식인데, 샤오미는 소비자 반응을 철저히 분석해 스마트폰 기능과 디자인에 반영한다. 크라우드 소싱으로 스마트폰을 개발하고 매주 목요일 소프트웨어를 신속하게 업데이트한다. 그는 “우리는 하드웨어를 주요 수입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를 포함해 전체 스마트폰 생태계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스마트폰에서 삼성전자를 이길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삼성의 휴대전화 매출액을 뛰어넘는 것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레이 쥔은 “삼성은 훌륭한 기업이다. 대규모 생산공정이나 글로벌 마케팅 부문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며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삼성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갤럭시 소비자는 삼성 휴대전화를 사면서 서비스가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샤오미 소비자는 우리 제품을 사면서 서비스가 시작된다고 본다. 샤오미와 삼성의 본질적인 차이다”라고 말했다.

샤오미는 마케팅 방식도 아주 독특하다. 기존 업체들과 달리 TV 광고나 옥외광고, 통신사 마케팅을 전혀 실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등을 통해 퍼지는 입소문 마케팅에 집중한다. 더구나 일반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샤오미폰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모든 제품을 인터넷 사이트에서만 판매하기 때문이다. 유통비용 절감만으로도 20~30%의 가격 인하가 가능하다는 게 샤오미의 설명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샤오미 스마트폰은 1000위안(약 17만5000원)을 넘지 않는다. 47인치 TV 가격도 3000위안(약 52만원 선)이면 구입 가능하다. ※ 42호에서 계속...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손유리 모바일부 기자]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347545

Posted by insightalive
,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회사(SNS) 페이스북이 인수한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whatsapp) 창업자가 페이스북 입사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뒤늦게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브라이언 액튼 와츠앱 창업자 트위터. /캡처
 브라이언 액튼 와츠앱 창업자 트위터. /캡처


와츠앱 창업자 중 하나인 브라이언 액튼(Acton)은 페이스북 입사 면접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트윗을 2009년 8월 4일에 작성했다. 액튼은 “페이스북이 날 떨어뜨렸다”며 “굉장한 사람들과 연을 맺은 좋은 기회였다”라고 썼다.

액튼을 낙방시킨 건 페이스북뿐만이 아니다. 액튼은 2009년 5월 24일 올린 트윗에서 “트위터 본사로부터 거절당했다”라며 “(합격했다면) 통근거리가 멀었겠지”라고 적었다.

페이스북으로서는 액튼을 낙방시키면서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 됐다. 액튼이 취업에 실패하고 창업한 와츠앱을 190억달러(약 20조원)에 인수했기 때문이다. 와츠앱은 액튼이 취업에 실패한 2009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해, 현재 전 세계 4억5000만명의 사용자를 둔 글로벌 서비스가 됐다.


출처: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24/2014022401613.html?main_hot

Posted by insightalive
,

Macworld
Steve Jobs's seven key decisions by Benji Edwards 

15년 전 스티브 잡스의 애플 복귀는 쓰러지기 직전의 애플이 다시 태어나는 반환점이 되었다. 복귀 후 8달 만에 애플의 iCEO에 오른 잡스는 냉엄하면서도 예리한 전략으로 망각의 단계에 들어서던 애플을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스티브 잡스가 작고한지 1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풍전등화 상태의 애플을 살리기 위해 애플 복귀 직후 내렸던 7가지의 중요한 결단들, 그런 결단들을 지금 다시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잡스는 하루에만 수십 가지의 결정을 내렸을 터, 이 글은 그런 결정 하나하나를 다루는 철저하고 완벽한 논문이 아니다. 이 글에는, 예를 들어, 아이맥이나 OS X, iPod 같은 신제품 개발을 주도한 그의 몇몇 중요 결정들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기업 운영 측면에서 애플을 살리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를 정리해 보려 한다.

고삐를 잡다

스티브 잡스가 내린 결단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은 애플을 다시 그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꼭 그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NeXT 인수를 1996년 후반에 마무리 지은 당시 애플의 CEO 길 아멜리오(Gil Ameilio)는 1997년 1월에 잡스를 애플의 특별 고문역으로 채용한다. 잡스는 고문역 위치에서 있으면서 조언이나 하고 권력 전쟁에서 빠져 있어도 상관없없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잡스의 체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잡스는 애플의 이사회에 아멜리오를 축줄할 것을 발빠르게 종용했다. 그리고 잡스가 그의 대체자로 지명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사회는 잡스의 의견을 수용했고, 애플의 고삐를 다시 잡스에게 맡기게 된다.


군살을 빼다

잡스가 돌아오기 전의 애플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매킨토시 데스크탑 라인업과 랩탑군, 서버 변종 모델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또한 별로 이문이 남지도 않는 프린터 제품군과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각종 주변기기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잡스는 애플의 전체 제품의 70%에 해당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내쳐버린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직도 몇몇 사람들의 가슴 한켠이 욱신거리게 만드는 뉴튼 PDA 경우를 들 수 있다.

잡스는 과거의 잘못된 경험을 잊고 완전히 새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앞으로 애플이 생산할 매킨토시를 네 조각으로 나뉜 격자로 분류했다. 두 개의 조각은 컨슈머 데스크탑(아이맥)과 랩탑(아이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나머지 두 조각은 전문가용 데스크탑(파워맥)과 랩탑(파워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네 조각의 격자 밖에 있는 제품들은 모두 끝을 맞이한게 된다.

iCEO 직을 맡은 첫 해 내린 잡스의 이런 제품군 축소 정책으로 인해 3,000명에 이르는 직원이 해고되었다. 제품군과 직원수의 축소는 처음엔 고통스러웠지만 평범한 제품을 수없이 생산해 내는 대신 소수의 훌륭한 제품 생산에 집중할 수 있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구조 조정

1996년 애플 이사회는 어떻게 하면 애플을 타기업에 더 비싼 가격에 팔아넘길 수 있을까를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잡스는 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굳건한 충성심을 보일 멤버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잡스는 이사회 대부분의 멤버들로부터 사직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하는데, 1977년도에 잡스와 워즈니악에게 애플을 세울 종자돈을 빌려준 전 애플 CEO 마이크 마쿨라(Mike Makkula)도 이 중 한명이었다.

이들이 비운 공석은 현 오라클의 CEO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ion)이나 애플 부사장직을 맡았던 빌 캠벨(Bill Campbell)같은 잡스의 측근들로 채워진다.

iCEO가 되기 전의 잡스는 NeXT 핵심 인재들을 애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앉히기 위해 길 아멜리오를 설득했다. 그 결과 OS X 탄생의 주역 아비 테바니안(Avie Tevanian)이 1997년 2월에 애플의 소프트웨어 부문 수석 부사장을 맡게 되었고, 몇 달 뒤 존 루빈스테인(Jon Rubinstein)이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의 수석 부사장직을 맡게 된다. 이후 잡스는 회사의 한정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여러 제품 단위(Product-centric) 개발 팀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마케팅 부서와 영업 부서, 생산 부서, 그리고 회계 부서 네 부문으로 회사 전반을 개편한다.

그후 오래지 않아 NeXT의 베테랑 직원들과 ’새로운 CEO’에게 충성할 직원들이 줄줄이 고용되면서 잡스의 급진전인 정책에 반기를 들 임원은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누설을 막다

애플 CEO 길 아멜리오를 당황하게 만들고 기존 정책 노선을 변경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정보 유출이 애플 직원들에 의해 번번히 자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불순한 움직임은 스티브 잡스 체제에서 완전히 뿌리뽑히게 된다. 임시 CEO직을 수락한지 얼마되지 않은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직원들이 언론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프레스(no-press) 정책을 제정한다. 앞선 정리 해고에 이어 잡스의 이런 기조강한 정책은 회사 내의 이견을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몇 년 후, 잡스의 노-프레스 정책은 애플 신제품 발표회의 비밀과 서스펜스 그리고 환호를 이끌어 내는 효과로 나타난다. 외부로 흘러나가는 정보를 꽉 움켜지고 컨트롤함으로서 잡스는 언론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다.


앙금을 풀다

첫 재임기간 동안의 스티브 잡스는 PC 시장을 전쟁터로 묘사하며 애플과 IBM 사이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이였다. 또한 그런 분위기의 확장 선상에서, IBM 하드웨어에 운영체제를 제공하던 마이크로 소프트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로 유명한 애플 운영체제의 룩 앤 필(Look and Feel)을 복제를 이유로 애플 vs 마이크로소프트로 대결 구도가 이어졌다.

애플과 MS 사이의 원한은 잡스가 애플에서 사임한 198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혹은 윈텔(*Wintel=Windows + Intel)에 대한 깊은 혐오는 그 후로도 애플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매킨토시의 시장 점유율은 한 자리 숫자로 내려 앉았다.

1996년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데스크탑 PC 전쟁은 이제 그 끝을 맞았고 그 승자가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한다. 애플이 이겨낼 수 없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대결을 위해 돈과 에너지를 털어넣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 애플은 그 스스로의 기준 안에서 냉철한 자세로 경쟁에 임해야 했다. 또한 레드몬드의 거인(=마이크로소프트)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기 보단 협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쓰러져가는 애플에게도 나은 선택이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크로스 라이센스 딜 성립 후 마이크로소프트는 상당한 인력을 투입해 이후 5년 간 매킨토시용 오피스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개발하게 된다.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성공을 진정으로 독려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애플의 주식을 취득하기로 약속했다. 그 대가로 애플은 인터넷 익스플로어를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기본 웹브라우저로 5년간 사용하는데 동의한다.

1997년 보스턴에서 열린 맥월드(Macworld)에서 스티브 잡스가 발표한 이 유명한 협정(스티브 잡스 뒤에 있던 커다란 스크린에 빌 게이츠가 등장)은 맥 매니아들에게 두 회사의 앙금이 풀어졌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애플 성공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며,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발표했다. 마이크로 소프트에 대한 잡스의 이런 입장 변화는 그 동안 구속되어 있었던 애플의 멘탈 에너지가 자유롭게 발산되는 것으로 이어졌고, 개발자들과 팬들이 쾌쾌묵은 주제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복제품을 말살하다

1994년부터 애플은 기기당 80불의 비용을 받고 Mac OS를 몇몇 하드웨어 업체들의 운영체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1년 후 이 라이센스 정책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애플에게 가장 높은 수익을 안겨주던 제품군이 이런 저가 복제품들에게 밀려 매출 감소를 겪어야 했고, 라이센스 정책을 통해 맥 플랫폼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려던 애플의 계획도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Mac OS 라이센스 프로그램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97년에 출시된 Mac OS 8부터 써드파티 업체들의 라이센스 요청을 스티브 잡스가 거부하면서 라이센스 프로그램도 자연스럽게 중단되게 된다. (UMAX 이 한 업체는 어떻게 OS 8을 1998년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에서부터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사용자 경험을 애플이 총체적인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던 스티브 잡스, 하지만 애플 이외의 업체가 하드웨어를 만든다는 것은 이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복제품들에 의해 희석된 매킨토시 브랜드, 만약 아직까지 복제품들이 생산되고 있었다면 애플하면 떠오르는 ‘비밀 엄수’, ’욕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애플을 지금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해준 제품을 생산했던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나단 아이브를 신뢰하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1996년에는 조나단 아이브가 애플 디자인 팀의 수장을 이미 맡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조나단 아이브는 이미 애플을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스티브 잡스의 회사 전반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은 보고 난 후 돌연 회사에 남기로 마음을 바꾼다.

스티브 잡스도 처음에는 디자인 부서의 수장 자리에 외부 스타 디자이너를 영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이브와 대면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계는 개인적인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디자인 철학에 대한 상대방의 주요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 찾은 동지애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외부 인사가 아닌 비교적 경험이 적은 디자이너에게 신뢰를 쏟아 붇는다. 그리고 이 한 쌍(물론 디자인팀의 노력도 포함해)은 이제껏 없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컨슈머 전자 기기 디자인을 창조해 내게 된다.



출처: http://macnews.tistory.com/336

 

Posted by insightalive
,

강일용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개발사 마이크로소프트(MS)의 새로운 최고경영자(CEO)가 결정됐다.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 47세), 지난 92년 MS에 입사한 후 22년 동안 근무해왔고, 최근에는 MS 엔터프라이즈와 클라우드 사업을 이끌어온 인도 출신 기술자다.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

사티아 나델라는 누구인가

사티아 나델라는 빌 게이츠, 스티브 발머의 뒤를 잇는 MS의 3번째 CEO다. CEO로선 3번째이지만, 세대 구분을 따르면 2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스티브 발머는 MS 초기 시절에 합류한 창립 멤버이기 때문. MS가 비로소 진정한 세대 교체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나델라는 1967년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태어났고, 마니팔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 학사를 취득했다. 이어 미국 위스콘신-밀워키 대학에서 전산학 석사를 받았고, 시카고 대학 MBA(경영전문석사)를 이수했다.

 

처음엔 윈도NT를 제작하는 부서에서 일했고, 2001년 스티브 발머가 전두 지휘하던 MS 비즈니스 솔루션 사업부에 개발 책임자로 배치됐다. 2006년 이 사업부의 총괄 관리자로 승진했다. 이어 2008년 검색, 광고 부서에 배치돼 인터넷 검색엔진 빙(Bing)을 시장에 안착 시켰고, 2011년 엔터프라이즈(기업 서버) 사업부로 이동했다. MS가 엔터프라이즈와 클라우드 사업부를 통합함에 따라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담당 수석 부사장을 겸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 2월 4일 마침내 MS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일개 사원으로 입사해 임원을 거쳐 최고경영자가 된다는 모든 직장인의 꿈을 이뤄냈다.

 

나델라는 MS의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사업부를 이끌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MS 오피스(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퍼블릭 클라우드로 옮긴 '오피스365'와 기업용 프라이빗 클라우드 구축을 위한 운영체제 '윈도 서버 2012' 출시를 주도했다. 세일즈포스닷컴, 오라클 JD에드워즈, SAP B1 등을 견제하기 위해 다이나믹스 CRM을 '다이나믹스 CRM 온라인'으로 전환했고, 아마존의 퍼블릭 클라우드 AWS, 구글 엔터프라이즈 클라우드 등과 경쟁하기 위해 자사의 퍼블릭 클라우드 '윈도 애저'를 IaaS에서 PaaS로 구체화 시켰다.

 

그의 주도하에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사업부는 크게 성장했다. 2012년 6월 기준 185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해 184억 달러 매출을 기록한 윈도 사업부를 뛰어넘었고, 2013년 6월 기준 203억 달러 매출을 기록해 200억 매출을 돌파하기에 이른다(MS는 회계 연도가 6월에 끝난다. 작년 3,4분기와 올해 1,2분기를 합쳐 한해 매출을 집계한다는 뜻이다). 마침내 MS가 세계 최대의 클라우드 회사로 거듭난 것. 이러한 흐름은 작년 4분기에도 이어졌다. 제작년 4분기와 비교해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사업부 매출이 2배 이상 성장했다고 MS는 밝혔다. 이 모든 성장을 나델라가 이끌었다.

사티아 나델라

나델라에게 주어진 과제

그렇다면 그가 MS 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 적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모바일과 클라우드가 세상에서 더욱 번창하도록 이끌어나가는 것(Our job is to ensure that Microsoft thrives in a mobile and cloud-first world)"이라는 글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MS라는 건물을 지탱하는 2개의 기둥에 새로운 기둥 2개를 더 보태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MS는 윈도, 오피스,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컨슈머&디바이스 등 4개의 사업부로 구성돼 있다. 윈도와 MS 오피스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우리 생활에 깊숙히 침투해있으며, 이제 두 제품을 제외한 삶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 두 사업부가 지금까지 MS를 지탱해온 기둥이다. 여기에 나델라가 수석 부사장 재임 기간 동안 새로운 기둥을 하나 더 보탰다. 바로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다. 많은 사용자가 MS가 윈도로 먹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2012년 매출을 기준으로 MS는 오피스,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 윈도, 컨슈머&디바이스 순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천하의 윈도가 고작 3위에 불과하다. 2013년 매출을 보면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와 윈도 사이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사용자의 인식과 달리 MS는 더이상 윈도로 먹고사는 회사가 아니다. (물론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PC 시장이 멸망해 윈도가 사라지더라도 MS는 별다른 문제 없이 회사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와 언론은 MS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인식한다. 일반 사용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컨슈머&디바이스 사업부가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컨슈머&디바이스는 윈도폰(스마트폰), 엑스박스(비디오 게임기), 서피스(태블릿PC), 기타 하드웨어(키보드, 마우스) 등 일반 사용자용 제품을 판매하는 사업부다. 윈도폰은 iOS와 안드로이드에 밀려 간신히 시장점유율 3위를 유지하고 있고, 엑스박스는 최근 플레이스테이션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서피스? 아이패드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애플의 굴욕이다. 때문에 투자자를 중심으로 MS는 컨슈머&디바이스 사업부를 정리하고, 주력 분야인 윈도, 오피스,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나델라는 일단 이를 일축했다. 윈도폰과 엑스박스 그리고 서피스는 사용자에게 더욱 뛰어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기기라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MS입장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다. 누가 뭐래도 스마트폰은 현재 IT업계의 핵심이며, MS의 주력 분야인 운영체제로 승부해야 하는 장소다. 엑스박스와 서피스 역시 마찬가지다. MS의 소프트웨어, 개발도구 등이 다른 개발사에서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무엇보다 사용자에게 MS라는 기업이 건재하며, 애플, 구글 등과 겨뤄도 밀릴 것이 없음을 알릴 수 있는 장소다.

1대 최고경영자인 빌 게이츠는 MS를 윈도와 오피스라는 기둥 위에 올려놨다. 2대 최고경영자 스티브 발머는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라는 기둥을 세울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발머는 컨슈머&디바이스라는 토대를 닦지 못했다. 나델라에게 주어진 과제는 명백하다. 발머가 물려준 토대 위에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라는 기둥을 굳건히 세우고, 컨슈머&디바이스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

 

일각에선 나델라가 컨슈머&디바이스를 매각하고, 엔터프라이즈&클라우드에 집중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MS가 컨슈머&디바이스를 매각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IT기업 가운데 손꼽히는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애플, 삼성전자에 이어 3위. 구글보다도 높다). 게다가 얼마 전 노키아를 인수하면서 컨슈머&디바이스에 더욱 집중할 것임을 알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기둥은 3개일 때보다 4개일 때 더 든든한 법. 나델라가 컨슈머&디바이스에서 어떤 역량을 보여줄 것인지 기대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나델라를 보좌하기 위해 IT업계의 전설도 현업으로 복귀했다. MS의 창업자이자 1대 최고경영자인 빌 게이츠다. 게이츠는 MS 이사회 회장을 사임하고 MS의 기술고문으로 복귀했다. 신입 최고경영자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그는 “나델라의 요청에 따라 MS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며, "여유 시간의 1/3 이상을 MS에 할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술 개발에 일정한 도움을 주면서 이사진 등의 외압으로부터 나델라의 바람막이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나델라 역시 게이츠의 복귀를 강력하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나델라가 최고경영자로 임명됨에 따라 외신을 중심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인도계 기술자의 강세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어도비시스템즈 산타누 나라옌 최고경영자, 구글 순다 피차이 부사장 등 인도 출신 엔지니어가 잇따라 IT업계 고위직에 오르고 있기 때문. 현업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가운데 인도 출신이 상당한 만큼 인도 출신 고위직 비중은 점점 증가할 전망이다.

사티아 나델라, 빌 게이츠, 스티브 발머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출처: http://it.donga.com/17290/

Posted by insightal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