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문선 (경북대학교 심리학과)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와도 같다'라는 표현을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감기란 증상을 심하게 앓고 극복해 내면 자가 면역력이 더욱 높아지듯이 슬픔이라는 감정 및 우울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나면 내면의 성숙이 뒤따르게 된다. '역경 후 성장'이란 표현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또 한편으론 아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인식되거나 '나는 절대 감기 따윈 걸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 생각할 경우에는 슬픔으로부터 성숙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로부터 멀어질 뿐 아니라 감기가 아닌 심각한 질환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남성은 나약하면 안 된다는 통념 속에 놓여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우울증상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감기 따위에 굴복되는 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남성 우울증은 여성 우울증에 비해 유병률이 매우 평가절하되어 왔으며, 은밀한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남성도 우울해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남성 우울증은 흔히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로 잘 인식되지 않았다. 첫째, 남성 우울증의 증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상과 다르다(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임상 장면에서 경험하게 되는 전형적인 여성 우울증 환자의 증상과는 상당 부분 차이가 존재한다).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성은 감정을 내면적으로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남성은 슬픔, 상념, 죄책감, 염려, 철회, 부정적 감정의 내면화 등과 관련된 여성의 우울증상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즉, 남성이 갑자기 화나 짜증을 내거나 강박적으로 알코올, 일, 성(性)에 몰두하는 경우 본인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울감이 원인인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 남성은 자신이 강해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울증의 문제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남성 우울증의 증상군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가족이나 임상가가 일반적으로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국제적 정신장애 진단체계로 사용되고 있는 미국 정신의학회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 포함된 우울증 진단기준은 실제로 남성 우울증보다는 여성 우울증에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임상경험으로도 우울한 남성은 자신의 우울 감정에 둔감한 경우가 많았다. 가족 내에서의 소외감과 삶의 중압감 및 우울감을 강박적인 일에 대한 몰두로 해소하고자 하는 남성 내담자에게 '현재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냐, 우울하지 않은가'를 질문하면 '그런 감정 느낄 여유가 없다, 업무를 잘 해내고 성취하는 게 문제지'라는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던 가장들이 IMF 위기 동안 정신과에 우울증 치료를 위해 몰려든 것은 어쩌면 어떤 '확실한, 보장된' 조건 하에서는 우울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아든 것이라 내면적으로 느껴서가 아닐까. 실제로 많은 남성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우울증상에 대해 수치심을 경험한다. 때문에 우울해지면 타인을 비난하거나 내부의 갈등을 행동화하고 어떻게든 문제해결을 통해 상황을 통제하고 우울감정을 회피할 수 있는 다른 자극적인 것들에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슬픔 혹은 우울이란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을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징검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애도(mourning) 작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란 애정 대상을 상실(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한 후 그 대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리비도(생의 에너지)를 분리시켜 슬픔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의 과정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적이라야만 우리는 상실에서 경험한 슬픔에 투여한 집착과 에너지를 철회하여 다른 대상에게 건설적으로 투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인상적으로 본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전도연이 열연한(이 역할을 통해 칸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 여주인공은 일련의 끔찍한 상실과정에서 경험한 트라우마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대상(종교)에 몰두하고자 애쓴다. 즉, 상실한 것에 대해 슬퍼하기보다는 상실한 것을 대신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그것이 치유에 도움이 되었는가? 분명 그 답은 '아니다'이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임상장면에서도 상실한 것을 가능한 빨리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환자의 시도는 결코 효과적이진 않다. 오히려 그 결과 증상이 악화되고 죄책감이 증폭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우리 사회의 남성들도 삶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상실로 인한 감정을 충분히 애도할 면죄부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우리 아들들도 발달과정에서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분노와 관련된 주제만 이야기하지 말고 슬픔과 혼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회피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수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때 부모의 최악의 반응은 아마도 '남자가 그만한 일로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 '그런 감정 느낄 여유가 있으면 경쟁사회에서 더 강해질 궁리나 해!' 등이 아닐까. 성장 중심의 우리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맏아들이 신경증(neurosis, 노이로제라는 표현으로 더 잘 알려진 우울, 불안, 심리적 위축 등의 증상)을 경험할 확률이 더욱 높다는 심리학적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를 우리는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생존과 경쟁의 낭떠러지 끝에서 경험했던 자신의 불안을 자녀에게 투사하여 자녀의 정서적인 반응을 유약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감정의 언어화 연습과 더불어, 자기 통제력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 우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하고 행동화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툭하면 거론되는 '분노조절장애'라는 현상도 근본적으로는 우울한 사회를 반영하는 어두운 일면이라 생각된다. 특히 청소년기의 비행행동의 이면에 소외감, 우울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면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 불리는 아동 청소년기의 특징적인 우울증상의 핵심은 뿌리 깊은 내면의 상실감과 우울감정이 신체증상의 호소, 반항, 공격적 행동 등의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을 나타내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자신의 상실 및 우울감정을 이해받거나 수용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격려할 때, 즉 충분히 애도할 때 통제력 또한 자연히 발휘될 것이라 믿는다.
모든 감정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감정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의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울은 우리로 하여금 애도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도록 만든다. 이제 우울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수치스러워하지도 말고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한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 참고문헌
  • Archibald D. Hart(2006). 남성 우울증 (조현주 외 공역). 학지사
  • RichardM. Ryckman(2013). 성격심리학 (장문선 외 공역). 박학사
  • 이승욱(2011). 상처 떠나보내기. 예담
  • 글. 장문선
  • 경북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상심리전문가이자 1급 정신보건임상심리사이며, '기혼여성 우울증 환자의 부부문제에 대한 인지-대인관계 치료의 효과' 등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우울장애, 대상관계, 성격장애, 역경 후 성장 및 긍정심리 등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webzine.kpsy.co.kr/2016autumn/sub.html?category=14&psyNow=11&UID=174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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