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관심사였던 단어들이 요즘 부쩍 자주 들린다.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VC’ ‘엑시트’ 같은 것들이다. 창조경제 바람 덕분이다.

스타트업(Startup)은 신생 벤처기업을 뜻한다.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란 스타트업에 초기자금·멘토링·네트워크 등을 제공하는 보육 시스템이다. 이 단계를 잘 마치면 VC(Venture Capital), 즉 창업투자사의 본격적인 투자 대상이 된다. 이후 성공적인 기업 활동으로 증시에 상장하거나 좋은 값에 팔리면 이를 엑시트(Exit)라고 한다.

창업이 창조경제의 핵심 의제로 등장하면서 이쯤 모르면 어디 가서 한 자락 끼기 어려워졌다. 대신 공허한 말 잔치가 흔하다. 실제 ‘스타트업-액셀러레이팅-투자-엑시트’의 사이클을 경험한 이가 적기 때문이다. 우리 창업생태계가 덜 여문 탓이리라.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이니 어디니 하면서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데, 이왕이면 진짜 쿨한 걸 배웠으면 싶다. Y콤비네이터(Y Combinator·YC) 말이다.

YC는 세계 최초의 액셀러레이터다. 실리콘밸리 창업의 역사는 YC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우리가 지금 액셀러레이팅이라 부르는 창업지원 시스템의 핵심 요소들을 창안했다. 경제지 포브스는 지난해 YC를 미국 1위 스타트업 투자기업으로 선정했다. 2005년 설립한 이래 YC에서는 30개국, 500여 개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그중 생존에 성공한 회사들의 평균 기업가치는 약 500억원에 이른다(2012년 4월 기준). 최대 히트작인 드롭박스의 경우 올 연말 4조5000억원 규모의 기업공개를 준비 중이다. 글로벌 숙박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 또한 기업가치가 2조원을 넘어선다. 세계적 정보기술(IT) 미디어 와이어드는 YC를 ‘스타트업 신병훈련소(boot camp)’라고 명명했다.

생존한 회사 평균 기업가치 500억원

그 결과 YC는 세계 인재들이 가장 선망하는 액셀러레이터가 됐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같은 거물들이 멘토를 자청한다. 성과의 중심에는 리더이자 공동창업자인 폴 그레이엄(Paul Graham·49)이 있다. 미국 경제지 ‘Inc.’는 그에게 ‘스타트업의 구루’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그가 에세이를 올리는 개인 홈페이지(paulgraham.com)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창업 관련 사이트 중 하나다.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성장한 그레이엄은 학창 시절, 본인 표현에 따르면 전형적인 ‘nerd’였다. 얼간이, 괴짜, 컴퓨터 매니어, 때론 촌스러운 공부벌레를 가리키는 단어 뜻 그대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다. 학교를 경멸하고 또래 집단에 섞이길 거부했던 그는 코넬대 철학과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꿈은 작가였지만 이후 방향을 틀어 하버드대학원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세계적 명문인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 등지에서 정식 미술교육까지 받았다. 그에게 예술과 프로그래밍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다. 저서 『해커와 화가』에서 그는 “해커(일급 프로그래머)는 과학자라기보다 창조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런 그를 ‘Inc.’는 ‘극단적으로 뛰어난 지능’을 지닌 ‘약간 거만한 사내’로 묘사했다.

폴 그레이엄은 ‘스타트업 구루’로 통하는 실리콘 밸리 창업계의 리더다. 그는 자신이 육성하는 창업자들에게 근검과 엄격한 자기 규율을 요구한다. 너무 빨리 망하거나 투자자들에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블룸버그 뉴스]

1995년 그는 친구와 비아웹(Viaweb)이라는 세계 최초의 웹 기반 애플리케이션 회사를 설립한다. 3년 뒤 야후는 이 회사를 4960만 달러에 인수한다. 오늘날의 ‘야후 스토어’다. 이후 새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Arc)를 창안하고 스팸 필터링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등 전설적 해커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2005년, 하버드대 컴퓨터학회에서 행한 강연 하나가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 놓았다.

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창업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하고 난 뒤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다 ‘나도 에인절(Angel·초기 개인투자자)이 없었다면 스타트업을 못했겠지’ 하는 데 생각이 미쳐 YC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당시 강연을 정리한 ‘스타트업을 어떻게 스타트할 것인가(How to Start a Startup)?’란 제목의 글은 이후 IT 분야 창업자들의 경전이 됐다.

40년 할 일을 4년에 몰아서 하는 작업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성공적 스타트업을 만들려면 좋은 사람들과 시작하고,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을 만들며, 돈을 최대한 아껴 쓰라’는 것이다. 아이디어란 실상 그리 중요치 않으며, 강박적이리 만큼 무섭게 일하는 파트너를 구하고, 첫 번째 서비스를 무조건 빨리 내놓아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인다. 공동창업자 간 지분 분배엔 ‘모두가 약간씩 박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 들 정도가 적당하다’ 식의 현실적 가이드라인도 제시한다. 무엇보다 스타트업은 ‘40년 할 일을 4년에 몰아 하는 만큼의’ 엄청난 노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세상의 부(富)를 창출하는 데 이보다 더 빠르고 좋은 길은 없음을 강조한다.

이런 생각에 따라 그해 여름 그레이엄은 비아웹의 옛 동료, 훗날 아내가 된 제시카 리빙스턴과 함께 YC를 설립한다. 비아웹 매각 등을 통해 번 돈을 재투자한 것이다. 이어 액셀러레이팅의 표준이 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될성부른 예비창업자를 뽑아 한 팀(1~4명)당 1만4000~2만 달러의 초기 자금을 자원하고, 3개월간 집중적인 멘토링과 기술·경영 조언을 제공한다. 대가로 약 6%의 지분을 받는다. 13주 차에는 유력 투자자들을 초대해 데모 데이를 갖는다. 이런 스타트업 스쿨을 매년 두 차례 진행한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게 매주 화요일 저녁 열리는 ‘만찬(Dinner)’이다. 지난 3월 미국 출장 중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있는 YC를 찾았다. 현장에서 만난 YC 멤버는 “실리콘밸리의 유력 투자자와 멘토들이 참여하는 만찬이야말로 YC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해도 YC 특유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초대받을 수 없다. 만찬에서의 대화를 밖으로 전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저녁 늦도록 새 아이디어와 투자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을 주고받는다. 그야말로 실리콘밸리 네트워크의 결정판이다.

미국의 벤처투자자이자 블로거인 프레드 윌슨은 “그레이엄은 아이들(창업자들)에게 돈만 주는 게 아니라 방법론과 가치체계까지 알려 준다. YC는 그저 투자회사가 아니라 컬트이며, 그레이엄은 그 지도자”라고 평한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액셀러레이팅, 멘토링 붐이 일고 있다. 한데 이름만 그럴싸할 뿐 프로페셔널과는 거리가 먼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다. 결국 답은 그레이엄처럼 성공한 창업 선배가 그렇게 이룬 부(富)로 후배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는 것이다. 본엔젤스·K큐브·프라이머·K스타트업·패스트트랙아시아 같은 국내 대표 액셀러레이터들의 활약을 고대한다.

이나리 은행권청년창업재단 기업가정신센터장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353&aid=0000013921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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