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하문(不恥下問)-논어 공야장편

[이 말뜻은?]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어느 날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공문자라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준 것인가요?

불치하문은 이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 내용입니다.

이 질문에 공자는 ‘문(文)’이라는 시호는 행동이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글공부를 하는 사대부에게 최고의 영예는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는 것입니다. 시호란 죽어서 내려주는 이름입니다.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는 시호를 받으면 최고의 영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례-1]

나이가 많은데 한글을 깨치지 못한 어르신들이 배우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배움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손으로 직접 깍은 연필을 잡은 손을 꼭꼭 눌러서 공책에 반듯하게 자신의 이름을 쓰고 멋쩍게 웃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그분들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어서 그분들의 가르치는 분들의 나이보다 보통 30세 이상은 많답니다.

집에서 보면 며느리보다 어리고 손주 같은 분들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십니다

.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는데 시간이 너무 아깝다. 좀 더 더 배웠으면 좋을 것을…….시간이 아깝다. 시간이.”

그분들은 전쟁으로 갖은 고생을 하는 바람에 배울 시기를 놓쳐서 이제야 연필을 들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습니다.

검정고시를 마치고 중학생 자격을 갖게 되면 영어 사전을 뒤적이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기도 합니다.

이런 어르신들이 갖고 있는 마음 자세가 바로 ‘불치하문(不恥下問)’입니다.

자신보다 30년 넘게 어린 선생님들에게 질문하거나 배우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서 길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해 볼까요?

 같이 간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모이기로 한 시간은 벌써 지났습니다.

 길에서 울고 있어야 할까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길을 찾아가야 할까요? 아마도 여러분들이 가진 체면을 다 버리고 누구든지 길을 막고 가르쳐 달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배움에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배우는데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배울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질문이 많은 학생은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례-2]

옛 부터 행동이 민첩한 사람은 배우기를 싫어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부분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본성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동생에게 물어 볼까요?

 네.창피하지요.만약에 부모님이 새로 산 핸드폰 사용법을 물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나요?

 네.다시 생각해 보니 부끄럽지요.

모르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수학문제를 모르는 데 수학을 잘하는 동생에게 묻기 어렵겠지요?

이렇듯 배움에는 나이도, 직위도, 남녀 구분도, 신분의 차이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하지만 글쎄요.그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일지요?

여러분이 돌이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은 어디서 답을 찾고 있을까요?

 친구에게, 동생에게,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인터넷으로…….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것에 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데 창피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지요?

그렇다면 아직도 배움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지요? 배우기 위해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그 누구도 창피하지 않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 말이 주는 교훈]

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이 모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사고 나면 하루 이틀정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켜야 하는지? 마우스는 어떻게 조작하는지? 프린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다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설명서가 있지만 그것을 보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이 답답하면 누구에게라도 묻게 됩니다. 그 때는 부끄러움도 없어집니다.

어서 빨리 이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리하여 묻고 묻고 또 물어서 알게 되면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겨우 이것 때문에’, 혹은 ‘아이고.참 나 원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가지고’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신이 답답했던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꺼려합니다. 교실에서도 질문이 없어져 갑니다. 모르면 인터넷 검색창에 그대로 입력하여 답을 얻으려고 할뿐, 사람에게 물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로 ‘네가 아는 것은 나도 안다’라고 생각하고 서로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람과의 대화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상공간에 카페를 만들어서 끼리끼리만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사람의 실명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서로간의 대화가 가능하고 정보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쪽팔리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질문하기’입니다. 가장 빠르게 배우는 방법은 ‘질문’이라고 합니다. 질문이 많은 학생이 실제로 공부도 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화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흔히 이야기 하는 ‘체면문화’인 것이지요.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인데 창피하게…….’ 혹은 ‘이것을 질문하면 다른 사람들이 놀릴 텐데.’라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질문이 점점 더 줄어들고 이름을 숨겨도 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정확하지 정보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난무하게 되는 것이지요. 묻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하기에 용감해야 합니다. 배움에는 나이도, 성별도, 장소도, 지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배움에 대한 열정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불치하문이 주는 메시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묻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라!

 

 

[본문 읽기]

子貢(이)問曰孔文子(를)何以謂之文也(잇고)

子曰 敏而好學(하며) 不恥下問(이라) 是以謂之文也(니라)

자공이 문왈공문자를 하이위지문야잇고, 자왈민이호학하며 불치하문이라 시이위지문야니라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에게 어째서 ’문‘이라는 시호를 주셨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민첩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문이라는 시호를 준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403&logNo=50173322440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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