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 산업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지식노마드’에서 펴낸 『축적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를 맡고 있는 서울공대의 석학 26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내용 가운데 석학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우리 산업계, 더 넓게는 우리 사회가 공통으로 빠져 있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릇된 고정관념 5가지를 정리한 것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그릇된 고정관념 5가지
1. 생산활동은 개도국으로 아웃소싱하고, 우리나라는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을 해야 한다.
생산활동은 3D 산업이기 때문에 아웃소싱하고, 우리나라는 깨끗한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을 하도록 국제적으로 분업해야 한다는 일반의 잘못된 시각에 대해 석학들은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 고정관념과 달리 현실에서는 생산현장이 없이는 질 좋은 고용을 창출할 방법이 없고, 생산을 지원하는 지식기반서비스업의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생산현장이 없으면 고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이 되는 고급의 경험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여지도 없다.
불행하게도 지난 10여 년 이상 우리나라에서는 생산공장을 개발도상국으로 내보내고, 국내에서는 지식산업이나 서비스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가 팽배했는데, 이는 미국을 포함한 산업선진국이 생산현장을 고도화하거나 이웃소싱해오던 기업의 생산활동을 다시 자국 영토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 정반대의 길이다.
2. 첨단 특허 1건, 세계적인 논문 1편이 10,000명을 먹여 살린다.
석학들은 탁월한 특허와 논문이 분명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결정적으로는 이 혁신적 아이디어가 스케일 업(scale-up)되어 실용화 단계로 나가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스케일 업 할 수 있는 역량은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고도의 축적된 경험지식의 영역이라는 데 어려움이 있다.
국내 산업계는, 전례가 없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스케일 업 할 수 있는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설사 국내에서 세계적 논문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 혜택은 다른 나라가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업들이 시행착오를 각오하면서 스케일 업 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3. 필요한 경험과 지식은 살 수 있다.
석학들이 가장 우려하는 잘못된 관념의 하나는 경험과 지식은 돈으로 사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우리 산업계도 이미 표준적인 기술에서는 글로벌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창의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고급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교과서나 매뉴얼, 논문 혹은 특허에 명시적으로 표시된 지식과 달라서 문자나 기타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대체로 사람의 머릿속에, 그리고 일하는 방식, 즉 루틴에 체화되어 있어서 심지어 필요한 경험지식을 가진 기업을 인수·합병을 한다고 하더라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석학들은 여러 가지 실제 사례를 통해 결국 최고급의 기술 역량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며,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축적해나가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중국은 우리의 생산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석학들은 한·중 간의 관계에서 한국이 부품소재를 공급하면 중국이 조립하거나, 혹은 한국의 기업들이 설계도를 보내면 중국이 생산하는 방식의 도식적 관계는 더 이상 성랍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강조한다. 중국은 이미 생산공장이 아니라 혁신공장(innovation powerhouse)으로 등장하였다.
공학인력 배출 수, 논문 및 특허의 양과 질, 그리고 생산현장에서 제시되는 창의적 아이디어의 사례 등을 고려할 때, 혁신의 관점에서 중국은 이미 대부분의 산업 영역에서 한국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부 석학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어떤 품목의 경우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이미 상식이 되었기 때문에 절대 부끄라워하지 말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중국에 대해 가져왔던 사고방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말하는 것이다.
5. 한국 대학들의 공학교육이 급속히 발전했다.
국제적 평가지표로 볼 때 한국 대학의 공학교육 순위가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석학들은 공통으로 여전히 학과 간 장벽이 높고, 논문 위주의 평가로 산업계의 현실과 더욱 거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교육연구체제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장 중요하게는 개념설계와 같이 창의적인 역량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특히 온라인 강의의 확산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기초적인 학문에 대한 교육이 무시된 채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는, 소위 준비되지 않은 융합교육에 대해서도 경종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다.
결국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
석학들은 산업 분야가 다르지만, 공통으로 우리가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깰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이러한 고정관념들을 낳게 하는 우리 산업의 현재 특질, 즉 더욱 근본적인 관점에서의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석학이 그 원인으로서 우리 산업이 개념설계(conceptual design)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은 그동안 경험의 축적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압축성장의 필연적인 부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념설계 역량은 제품개발이 되었건,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건 산업계가 풀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이 문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량으로서, 실행 역량이 필요한 단계보다 더 선행 단계에서 요구되는 창조적 역량이다. 그런데 이 개념설계 역량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반드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시행착오를 ‘축적’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새롭게 접하는 문제에 대해 창의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해보고, 실패하고, 또다시 시도하는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의 축적 없이는 개념설계 역량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국처럼 지금부터 100년을 기다리면서 찬찬히 경험을 축적해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중국과 같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경험을 축적해나갈 공간적 이점도 앖다. 우리 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을까?
잠정적인 해답은, 산업 차원의 축적 노력으로는 선진국과 중국의 축적된 경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산업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어 국가적으로 축적해가는 체제를 갖추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 전반의 인센티브 체계, 문화를 바꾸어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변화해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축적의 범위를 산업의 바깥 경계로 극적으로 넓혀 생각할 때, 비로소 선진국의 시간과 중국의 규모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축적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원문: 곽숙철의 혁신 이야기
출처: http://ppss.kr/archives/6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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