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규석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한국심리학회가 70번째 생일을 자축하면서 풍성한 학술잔치를 벌였다. 1946년에 7명의 심리학자로 출발한 학회가 이제 16,000명이 넘는 회원 수에, 15개 분과학회를 갖추고, 전문학술지 13가지를 발간하는 정도로 성장하였다. 전임 학회장 몇 분들께서 여러 분야의 학술활동 성과를 점검하고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국심리학회의 현황을 놓고 보았을 때 모든 국내의 학회를 통틀어서 가장 활성화된 학회라는 평가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매우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는 여전히 '달빛 학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햇빛 학문'을 하기보다는 연구와 응용하는 힘을 스스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구미에서 가져다 쓰고 있다.

해는 자가발전을 하면서 만물을 살리는 햇살을 천하에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햇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에 어슴푸레한 달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예술 장르나, 반도체, 가전 산업 등의 분야에서 한국은 해처럼 자가발전을 하며,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살이를 들여다보는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의 학자들 대부분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 방법은 물론 개념과 이론마저도 미국과 유럽이라는 해가 내뿜는 빛을 받아서 쓰고 있다.

('햇빛 학문'과 '달빛 학문'의 비유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전임 회장이었던 항공대학의 최봉영 교수가 '교수신문'의 글에서 제시했음). 물론 쓸모가 있다고 여기니까 그리한다. 그러나 사람살이가 같지 않기 때문에 달빛이라는 어스름한 빛으로 본다면 보이는 것만 보게 되어 대충 볼 수밖에 없다. 달빛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어스름한 불빛으로 보게 되니까 정확하게 볼 수 없다.

한가지 예로 자기(self)의 개념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중등 및 고등 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자기에 대한 정체감이 흐릿하면 무언가 잘못 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모색해 왔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한국의 성인들이 자기정체감을 확고히 하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근자에 들어 비교문화심리학의 여러 연구들은 자기 명료성, 자기 일관성은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의 덕목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포착하여 문화적 자기의 특성을 제시한 이론(Markus & Kitayama, 1991)은 심리학사를 통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나'라는 임자가 '너'라는 임자를 만나 독자성을 유지하는 대신에 '우리'로서 '쪽'을 이루어 어울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상호의존적 혹은 상호협조적(Interdependent) 자기'라는 모호한 개념으로는 적절히 다루어지기 어렵다. 두리뭉실하게 다루어질 뿐이다. 문화적 자기의 특성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한국인의 '쪽' 자기가 어떻게 우리의 부분으로서 기능하고, 영향받고, 변화되며, 한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탐구된 바가 거의 없다. 이론적 개념을 빌어다 번역해서 쓰는 한에서는 두리뭉실함을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대충하면서도 대충한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 학문의 식민성 논의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가실 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심리 현상은 우리의 생활 말로 벌어지지만 이를 분석하는 틀과 개념은 외국에서 가져다 비추어보는 것이 식민적 학문하는 모습이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 한자를 빌어다 써야만 학문하는 것으로 여겼고, 우리말과의 개념과 쓰임에서의 차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고 무시하였다. 이황과 정약용이라는 두 걸출한 학자가 이러한 차이에 주목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미국, 프랑스, 독일어의 생소한 개념들을 가져다 적용하면서 이 개념들에 맞추어 현상을 재단하였다. 그들 개념을 알아야 우리의 마음과 사회현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겨왔다. 사실 우리가 익숙한 심리학의 이론은 구미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파악하고 이론화시킨 토착 심리학이다.

1970년대 필리핀의 심리학자 엔리쿠에즈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필리핀 사람을 연구하면서 이를 깨닫고 '토착(indigenous) 심리학'이란 용어를 제시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고 최상진 교수(2011)가 이에 눈을 뜨고 한국인의 마음을 우리말로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구미인들의 사회와 삶에서 개인이 중심에 있기에 '자기'니 '정체성'이니 하는 것들이 심리학에서 핵심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심지어는 연인관계마저도 정체감의 융합으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래서 서구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기어츠는 미국을 그야말로 '독특한(peculiar)' 문화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문화의 심리학 이론들은 참고용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째로 가져다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적용하고 분석의 틀로 삼는 것이 식민지 학문이고, 바로 달빛 학문 이다.
마인드는 마음이라고 번역되어 같은 의미라고 여겨지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만 유사할 뿐, 실생활 속에서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마음'은 심장에 비유되며 다스리는 의지(마음먹기, 마음챙김 등)와 상대방과 주고받는 돌봄의 의미(마음 주고받기 등)가 강하다.

반면, '마인드'는 머리에 비유되며 생각, 기억, 인지의 의미로 주로 쓰인다. 서구의 심리학이 20세기 후반에 펼쳐지는 정보혁명과 더불어 크게 발전한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정보의 기억과 운용과정으로 보는 서구인의 마음 관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런 정보처리 관점에서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의 토착 심리학이 보편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마음에 대한 이해로 충분한가?
 
서구인의 마음씨가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듯이, 우리의 마음씨도 우리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구인도 돌봄의 마음, 의지로서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런 의미로 쓰기도 한다. 마음챙김(mindfulness) 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사람의 본질을 개체로서가 아니라 어울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우리성을 삶의 중심에 두어온 한국인의 심성에 대한 연구와 이론의 구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의 본질로서의 우리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온전한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의 균형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맞고 있는 생태계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우리말의 뜻과 쓰임새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인의 토착 심리학은 우리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말의 쓰임에 관심을 두는 학자들이 많아야 비로소 햇빛 학문으로서, 환한 빛을 사위에 내뿜게 될 것이다.
  • 참고문헌
  • ※ 본 글은 최봉영 교수와의 대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 최상진 (2011). 한국인의 심리학. 서울: 학지사.
  • 한규석, 최상진 (2008). 마음의 연구와 심리학: 마음의 문화심리적 분석에 바탕한 심리의 작용 틀.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27, 281-307.
  • Markus, H., & Kitayama, S. (1991). Culture and the self: Implications for cognition, emotion, and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98, 224-253.
  • 글. 한규석
  • 미국 Ohio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의 이해'(4판 출간 예정)를 저술하였으며, 현재 한국인의 마음의 특성, 서열교류 양상, 도덕성 발달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출처: http://webzine.kpsy.co.kr/2016summer/sub.html?category=9&psyNow=11&UID=159

Posted by insightal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