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성열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우리 사회에는 유독 안전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언론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위 '안전불감증'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쉽게 말해 '안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증세'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증상이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는 것일까?
한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행동 특징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공통적 성격, 즉 '문화(文化)'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왜 우리는 안전에 둔감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라고 질문해야 하고, 그 대답을 시급히 찾아야 한다.
한국 문화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전불감증'이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잘살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설명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한강의 기적'을 내세운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이룬 경제적 업적을 우리는 단 몇십 년 만에, 그것도 전쟁의 참화 속에 완전히 잿더미가 된 상태에서 이룬 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경제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물론 한국 사람들이 능력이 많고 부지런하게 일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착실하게 차근차근 성과를 축적해가기 보다 '빨리빨리' 눈에 보이는 성과 위주의 생활이 몸에 밴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안전하게 일을 하려는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는 '꽁생원'이나 '쩨쩨한 사람' 또는 심하게는 '쪼잔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무모하게 일을 진행하거나 법을 어기면서까지 성과를 빨리 내는 사람을 '통이 큰 사람'이라든지 '배짱이 있는 사람' 또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 등으로 부르면서 오히려 칭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강하다는 것이다. 낙관주의(樂觀主義)를 '세상과 인생을 희망적으로 밝게 보는 태도'라고 정의한다면, 낙관주의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세다. 하지만 낙관주의가 진정한 위로와 힘을 주려면 그것은 현실적(現實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희망적 태도의 근거가 현실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가지게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이 살아가기에는 비관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 Soören Aabye)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절망에 삶은 결국 '죽음을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비현실적'으로나마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안전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제는 '현실적 낙관주의'를 가질 만큼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문화를 바꾸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단지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자체가 인권을 존중하고 인명을 제일 귀하게 여기도록 바뀌어야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된다.
  • 글. 한성열
  •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심리학, 통일심리학, 성인심리학 등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한국 문화와 상담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webzine.kpsy.co.kr/2016summer/sub.html?category=13&psyNow=13&UID=161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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