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이니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조선시대에 수신제가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2년도에도 그녀가 수신제가를 위한 롤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그녀가 현모양처가 맞긴 한 것일까?

신사임당은 왜 현모양처인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김구 선생도, 유관순 열사도 아닌 신사임당이 5만원권 지폐의 얼굴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추구하는 21세기에 순종적인 여성상을 대표하는 그녀는 어울리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알려진 것처럼 현모양처도, 순종적인 여성도 아니었다.

현모양처를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내조에 힘쓰며 아이들을 잘 키우는 여자’라고 정의한다면 신사임당은 처음부터 이에 부합되지 않는다. 열아홉 살에 남편 이원수와 결혼한 그녀는 약 20년간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재능이 출중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신사임당의 아버지가 사위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했고, 남편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남편 내조는 어땠을까? 신사임당은 결코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보다 똑똑해,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당찬 여인이었다. 한번은 남편 이원수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러자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 남편이 3년간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다. 훗날 이원수가 낮은 관직에라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컨트롤한 신사임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죽기 전 그녀가 유교 경전까지 인용해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절대 재혼하지 마!”였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술집 작부와 눈이 맞아 집안일과 아이들을 홀대한 남편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그렇다면 신사임당은 현모이기는 했을까? 훌륭한 어머니상으로도 유명한 신사임당은 자식들을 철저하게 교육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일명 ‘방목’하듯이 키웠다. 그녀의 자식들 중 가장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 율곡 이이도 마찬가지. 이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할 때 교육 부분보다 그녀의 성격이나 재능을 주로 말할 정도로 신사임당은 자식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신사임당이 어떻게 현모양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율곡의 제자 송시열이 그녀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며 “그가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을 추켜세우고자 했는데,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워낙 무능력한 인물이라 결국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추앙하며 율곡의 명성을 드높인 것이다.

신사임당에게서 여성상을 찾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만들어진 현모양처’였던 신사임당에게서 우리는 ‘진짜’ 현모양처를 찾아볼 수 있다. 나이가 쉰이 넘도록 일정한 수입 없이 과거 공부를 하는 고시생 팔자였던 남편을 대신해 신사임당은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며 아이 일곱 명을 키워냈다.

비록 조선시대나 20세기 기준으로는 신사임당이 아이들에게 해준 것 없는 어머니로 평가되지만,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매우 창의적이고 열린 사고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한 어머니다. 신사임당은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이들 앞에서 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어 창의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왔다.

또한 아이들에게 효를 다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부모에게 효를 행했다. 신사임당은 자식을 자연스럽게 방목하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참다운 모범을 보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았다. 특히 큰딸 매창은 어머니를 닮아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알아채고 평범한 여자 아닌 예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독려했다.

신사임당은 자신의 재능 역시 결혼을 이유로 희생하지 않았다. 일곱 살부터 시작한 그림을 출산과 육아 기간에도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갔다. 학문도 마찬가지였다. 늘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바쁜 와중에서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인 논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부모로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 자식들을 대했다. 훗날 율곡 등 후손들은 그녀를 ‘희생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교훈을 주는 스승’으로 보았다. 신사임당은 결국 남편과는 동등한 위치에서 집안을 함께 운영하고,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게 노력한 여성이었다. 이것이 21세기에 보는 신사임당이다.

2012년, 수신제가를 생각한다면 신사임당은 분명 현 시대의 여자들이 닮아야 하는 여성상이 틀림없다. 그동안 알려진 바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수동적인 여자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수신제가에 힘쓴 여성으로서 신사임당을 본받아야 할 때다.

취재
 
최진주 기자
 
강하나 기자
사진
 
김남우


출처: http://m.navercast.naver.com/mobile_magazine_contents.nhn?rid=1094&contents_id=8686

Posted by insightal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