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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나이 서른을 ‘이립(而立)’, 즉 ‘스스로 뜻을 세울 때’라고 칭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자립한 30대는 한국 사회의 든든한 주축이었다. 대기업 취직도 어렵지 않았고,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열심히 저축만 하면 거뜬히 내집마련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대한민국 30대는 다르다. 어느 세대보다 나약해졌다. 결혼, 내집마련은커녕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취업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직장에 들어가도 ‘저녁이 없는 삶’에 시달린다. 매서운 구조조정 바람에 자칫 직장을 잃을까 불안에 떤다. ‘늦깎이 공시족(공무원 시험 준비생)’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흔하다. 막상 결혼을 해도 30대가 맞닥뜨린 삶은 만만찮다. 서울 시내 아파트 구입은 언감생심. 전셋집 하나 마련하는 것도 힘들다. 설문조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30대 삶을 들여다봤다. 

■ 30대 실상 들여다보니 

대출 갚느라 소비 줄이고 저축 꿈도 못꿔 

어렵게 취업해도 구조조정 바람에 불안
 

# 대기업 직장인 최준호 씨(가명·37)는 연초부터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대학 졸업 후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했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아내와 결혼해 어여쁜 딸도 얻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지만 그는 “삶이 힘들고 재미없다”고 말한다. 

“평일엔 밥 먹듯이 야근하고, 아내와 맞벌이까지 하지만 통장 잔고를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매달 전세 대출 이자에 딸 키워주시는 장모님 생활비, 카드값 빠져나가면 월급 받아 남는 게 거의 없어요. 내집마련 희망은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회사에서도 열심히 일해봤자 경쟁이 워낙 치열해 임원 되는 건 꿈도 못 꿔요. 아무 걱정 없이 훌쩍 여행이나 떠나고 싶네요.” 

30대는 원래 청년에서 기성세대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다. 가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가사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라는 내용이 담긴 것도 이 때문. 하지만 요즘엔 30대도 취업난을 겪으면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청춘’인 경우가 많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말 취업 지원 사업 혜택을 받는 청년 기준을 기존 15~29세에서 15~34세로 올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취직해도 직장생활부터 만만찮다. 대리, 과장급으로 한창 일할 나이지만 재계 구조조정 바람에 휘말려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고민이다. 앞날이 막막하지만 결혼 후 자녀 양육까지 짊어져야 해 여가는커녕 건강을 챙길 여유조차 없다. 대한민국 30대의 삶이 다른 세대보다 훨씬 팍팍한 이유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도 아니다. 매경이코노미가 엠브레인에 의뢰해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30대의 가장 큰 고민은 ‘경제적 어려움’(42.7% 응답)이었다. 30대들은 갈수록 치솟는 집값에 내집마련은커녕 아파트 전셋집 하나 구하기도 벅차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평균 5억5130만원. 지난해 2인 이상 가구 월평균 처분가능소득이 356만2900원인 걸 감안하면 한 푼도 쓰지 않고 12.9년을 모아야 겨우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60년에는 30대 인구 중 미혼율이 2.1%에 불과했지만 2010년 39.9%로 높아졌다. 30대 10명 중 4명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결혼 연령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한국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의 경우 32.6세, 여성은 30세(2015년 기준). 한때 30세가 넘으면 노총각, 노처녀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아직 젊으니 천천히 해도 된다’ ‘맘에 드는 짝도 없는데 억지로 결혼할 필요 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대출 부담 허덕이면서 소비 지출 급감 

초혼 연령 높아지고 결혼 비율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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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미혼자 중에선 혼자 식사하고 여가를 즐기는 이른바 ‘혼족(나홀로족)’이 넘쳐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27.1%를 차지했다. 혼자 살고 혼자 즐기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30대 혼족은 다양한 SNS를 활용하면서 지인들과 관계를 다져나가는 덕분에 굳이 오프라인 만남 없이도 외롭진 않다. 

공기업에 다니는 정 모 씨(32)는 대표적인 ‘혼족’이다. 미혼이면서 서울 도심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그는 나홀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사를 즐긴다. 주말에 혼자 영화 보고 저녁엔 호프집에서 술도 마신다. 저축은 전혀 하지 않고 결혼도 포기한 지 오래다. 정 씨는 “나홀로 여가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결혼 후 내집마련, 자녀 양육에 시달리는 친구들을 보면 굳이 결혼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재테크할 돈으로 해외여행 다니며 현재를 즐기는 게 나을 듯싶다”고 털어놨다. 

혼자 여가 시간을 보내는 30대는 출판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이기도 하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 구매 고객 중 가장 많은 38.6%가 30대였다. 특히 30대 여성 구매율이 27.3%로 30대 남성(11.3%)보다 2배 이상 높았다. 

30대는 어떤 책을 읽을까. 주로 ‘힐링서’와 ‘자기계발서’가 많다. 올 들어 5월까지 예스24 집계 결과 30대가 가장 많이 구입한 책은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이 책은 나 자신과 세상을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을 담은 대표적인 힐링서다. ‘미움받을 용기’(2위), ‘5년 후 나에게 Q&A a day’(6위),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8위), ‘법륜 스님의 행복’(9위)도 힐링서 아니면 자기계발서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가 자기계발에 몰두하면서도 삶에 지쳐 힐링을 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부 자금력 있는 30대는 주택 매매 시장에 적극 뛰어들기도 한다. ‘매매가격에 육박하는 전세금을 부담하느니 차라리 저금리로 돈을 빌려 아예 집을 사는 게 낫다’는 인식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올해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분양한 ‘힐스테이트 백련산 4차’는 전체 계약자 중 30대 비중이 36%로 가장 높았다. 

문제는 30대 가구 대부분이 거액의 부채를 안고 집을 산다는 사실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30대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2010년 117.7%에서 2014년 127.8%로 무려 10%포인트 뛰었다. 대출 부담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스레 씀씀이를 줄이면서 삶의 질은 더 팍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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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거주하는 이 모 씨(38)는 가족들과 ‘무지출 운동’에 나섰다. 아예 지출을 하지 않을 순 없지만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다. 신혼 때만 해도 주말마다 동해안, 남해안 등 전국 곳곳을 여행 다녔지만 최근엔 주로 한강공원에서 여가 시간을 보낸다.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때그때 온라인으로 소량만 주문한다. 집에선 ‘냉파(냉장고 파먹기)’ 즉 냉장고 속 재료만 가지고 반찬이나 요리를 해먹는다. 이 씨는 “이대로 가다간 은행 대출금을 영원히 못 갚을 것 같아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있다. 대출 부담이 사라질 때까진 이런 생활을 꾸려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30대는 이전 세대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고 스펙도 뛰어나지만 그만큼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불만도 많다. 

“현재 50대의 대학 진학률이 15%라면 30대는 70%에 육박한다. 이전 세대보다 자유롭고 세계화, 디지털화된 세대라 스펙은 물론 잠재력도 뛰어나다. 그럼에도 취업이 안 된 이들은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가 돼버렸다. 어렵게 취업한 30대들도 직장에서 그들의 가치나 문화가 용인받기보다는 이전 세대 눈치를 보며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답답해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배준희·노승욱·강승태·나건웅 기자 / 그래픽 : 신기철]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61호 (2016.06.08~06.14일자) 기사입니다]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no=416441&year=2016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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