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점장인 35세 싱글녀 수짱은 ‘노후에 대비해 적금을 들까’ ‘요가학원에 등록할까’를 고민하다가 요가학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면서 “단지 미래만을 위해 지금을 너무 묶어둘 필요는 없다”고 중얼거린다.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용이다. 4권짜리 ‘수짱 시리즈’는 소소한 행복으로 미래 불안을 헤쳐나가라고 토닥여 주는 게 전부인데 일본에서 54만권이나 팔렸다. 일본 젊은 층인 사토리 세대가 이 ‘힐링툰’에 열광한 결과다. 

사토리(さとり)는 ‘득도, 깨달음’이란 뜻으로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욕망 없는 세대’를 일컫는다. 이들은 소비에도 정치에도 연애에도 외국여행에도 무관심하다. 욕망이 들끓고, 열정이 넘치는 청춘기 특징 대신 노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무기력이 이들을 지배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일본 정부가 실시한 생활만족도 조사에서 20대 79.1%가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20년간 이어진 불황, 재정적자, 비정규직 2000만명 등 현실은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녹록지 않은데 이처럼 낙관적이라니 실로 의외다.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란 책에서 이들이 행복한 이유를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미래가 절망적이니 현실에서라도 즐겁게 살고 보자는 ‘비틀린 행복’이라는 것이다. 사토리 세대에게는 유신이란 바람을 일으킨 사카모토 료마의 대담한 꿈도, 기업을 일군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불굴의 의지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기성 세대들은 “젊은이들이 일본을 망칠 것”이라며 혀를 찬다.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게 아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사토리 세대 징후가 보이고 있다. 사토리 세대는 거품경제 붕괴로 일본이 저성장 사회에 돌입하면서 출현했다. 한국도 4년째 3%대 성장에 머물면서 취업난이 심각하다. 결혼·연애·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 비정규직 ‘장그래 세대’는 사토리 세대와 많이 닮았다. 

사토리 세대가 왕성한 소비력을 자랑하는 ‘단카이 세대(1947~1949년 출생)’에 치이는 것처럼 ‘장그래 세대’도 고도 성장기를 거친 ‘베이비부머(1955~1963년 출생)’ 위세에 눌려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고성장에 힘입어 성공을 쟁취했고 부동산 호황으로 부를 일궜다. 반면 20·30대에게 취업은 바늘구멍이고, 결혼해도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꾼다. 심지어 아버지·삼촌 세대와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 보니 패기도 없고 나약하다. 드라마 ‘미생’ 은 잠복해 있던 수많은 장그래의 한숨과 고뇌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 국내 비정규직은 669만명으로 일본에 비해 적지만 비율로 보면 한국(35.5%)과 일본(38%)은 비슷하다. 청년실업률은 7.9%에 달하는데도 정책 초점은 ‘표’가 되는 노인이나 40·50대에 맞춰져 있다. 청년을 착취하는 ‘열정페이(열정으로 쥐꼬리 페이를 극복하라는 세태)’ 악습까지 생겨나고 있다. 정부는 최근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지만 더 많은 장그래를 양산할 수 있다는 반발도 크다. 

사토리 세대는 국가적 관점에서 보면 걱정거리다. 욕망 없이는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그래 세대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토리 세대보다 희망적이다. 대학가에 ‘최경환 대자보’를 붙이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결국 체념하게 될 것이다. 사토리에게는 단카이 세대가 쌓아올린 풍요라는 기반이 있지만 장그래 세대는 그마저 약하고 학자금, 스펙 투자로 짊어진 빚도 많다. 시간당 최저임금(5580원)도 일본 (780엔·7130원)보다 적어 사토리 세대보다 더 무기력한 세대가 될 수 있다. 이들에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말은 위로가 안 된다. 장그래 세대가 ‘대책 없는 행복’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세대 격차를 줄여야 한다. 연금개혁으로 자신들 짐을 후대에 떠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심윤희 논설위원]


출처: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5&no=36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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