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년 동안 인간과 공생관계…비만·암·치매 등의 원인으로
인체내 39조개…세포보다 많아 미생물 관리가 건강까지 좌우

혈액형처럼…장내 미생물 3가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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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사진 제공 = 네이처]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

300만년의 진화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인류. 명석한 두뇌, 자유로운 손과 발을 무기로 짧은 시간에 지구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류 앞에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났다.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오랜 시간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물이다. 산소가 부족한 극한 환경에서도 이들은 먹이를 찾고 새끼를 낳았다. 예상외의 '강적'이다. 무려 30억년 전 지구에 출현해 진화한 뒤 인류와 공생해온 '장내 미생물'이 그 주인공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인 이들은 인류가 진화하는 동안 우리의 장속에 생활 터전을 만들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들이 최근 인류에게 '경고장'을 던지고 있다. 자신들의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비만은 물론 당뇨, 암, 심지어 치매까지 일으키겠다고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선택해야 한다. 이들을 지배할 것인가, 이들에게 지배당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인체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미생물)의 수는 총 39조개. 인간 세포 개수인 30조개보다 1.3배나 많다. 장내 미생물의 총 무게는 약 2㎏. 수 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크기의 조그만 미생물이 대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장내 미생물은 인간이 가축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생물이다. 개나 고양이보다 먼저 인류는 장내 미생물과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숙주인 인간과 장에 서식하는 미생물은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 동안 복잡한 상호작용을 형성해 왔다. 인간은 장내 미생물에게 위협받지 않으며 그들에게 터전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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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장내 미생물은 포근한 장속에서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을 영양분 삼아 번식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미생물이 음식물을 분해하거나 죽으면서 내뿜는 물질 중에는 비타민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함께 오래 살면 닮아간다고 했다. 장내 미생물과 인간도 마찬가지다. 장내 미생물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거꾸로 사람의 성별, 나이, 먹는 음식 등을 분석하면 어떤 장내 미생물이 많이 살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벨기에 루벤대 미생물학과 그웬 팔로니 교수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 같은 상관관계가 무려 92%에 달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벨기에인 1106명과 네덜란드인 1135명, 전 세계인 3958명을 대상으로 장내 미생물의 종류와 함께 사람들의 특성을 조사했다. 특성에는 키, 몸무게, 성별, 나이뿐 아니라 맥주·과일 섭취량, 아침식사의 유무 등 69가지의 다양한 내용이 포함됐다. 결과는 예상대로 사람의 생활습관에 따라 장내 미생물은 공통된 습성을 보였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끼리, 과일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들끼리 장내 미생물 군집이 비슷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박종화 울산과기원(UNIST) 생명공학과 교수는 "장내 미생물은 인간의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해왔다"며 "인간이 말하는 '체질'이 바로 장내 미생물 종류를 이야기할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장내 미생물이 처음 학계에 등장하며 관심을 끌었던 것은 2011년 독일 연구진의 '네이처' 논문이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유럽분자생물연구소 페어 보르크 교수 연구진은 덴마크와 프랑스 등의 유럽인 22명과 미국인 2명, 일본인 9명의 대변에 있는 장내 미생물을 분리해낸 뒤 유전체 분석을 했다.

유전체 분석을 통해 미생물의 종류를 구분하자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치 혈액형처럼 장내 미생물의 종류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르크 교수는 "인간의 장속에는 크게 박테로이데스, 프레보텔라, 루미노코쿠스 등 3가지 박테리아 중 하나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며 "인종과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이런 패턴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각각의 미생물은 특징이 있다. 박테로이데스는 탄수화물 분해능력이 뛰어나다. 반면에 루미노코쿠스는 세포가 당분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박테로이데스의 사람들보다 루미노코쿠스형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살이 찔 확률이 높을 수 있다.

김지현 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 교수는 "최근에는 세 유형이 아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며 "사람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미생물군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속 연구 결과 박테로이데스 유형의 사람들은 고지방·저식이섬유 식단을 즐겼으며 프레보텔라 유형은 저지방·채식 위주 식단을 유지했다. 루미노코쿠스형은 박테로이데스와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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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 미생물 연구는 유전체 분석 기술의 발달과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찍이 장내 미생물의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은 2007년부터 '인간 장내 미생물 프로젝트(HMP·Human Microbiome Project)'를 시작했다. '세컨드 지놈 프로젝트'로 화제를 모았던 HMP는 2007년부터 5년 동안 첫 번째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2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HMP는 미국인 242명의 코와 피부, 입, 소장 등 15개 신체 부위에서 미생물을 채취해 유전체 분석을 마쳤다. 종류는 무려 1만2000가지가 넘었다. 이 중 최소 160여 개의 미생물이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됐다.

현재 HMP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장내 미생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의 질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김지현 교수는 "염증성 장 질환, 당뇨병 등 각종 질병과 장내 미생물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미생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인간 건강과의 연관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비만, 아토피, 당뇨 등과 장내 미생물의 상관관계가 밝혀졌다. 장내 미생물은 이제 질병을 넘어 뇌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하나둘 발표되고 있다.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장내 미생물이 장속으로 들어온 음식물의 다당류를 분해해 혈뇌장벽을 강화시키고 세로토닌 호르몬의 분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우울증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동물 실험은 대조군 비교가 쉽기 때문에 장내 미생물이 미치는 영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이 같은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미국 해군연구소 등 많은 연구진이 장내 미생물과 뇌질환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기 위한 대규모 연구를 시작하기도 했다. 박용하 영남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사람의 건강에 유전자는 20~30%, 후생 유전자가 20~30%, 나머지는 장내 미생물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앞으로 장내 미생물의 조절, 치료를 통해 인간의 수명, 건강 등을 조절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호섭 기자]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no=355353&year=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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