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사는 게 불쌍해" 장모님은 왜 그랬을까

[서평]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


아내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만의 마지막 오붓한 여행은 첫째 아이를 가진 2004년 즈음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의 출근 준비는 새벽부터 이어진다. 나는 비교적 '칼퇴근'을 하지만 아내는 늘 '무보수' 초과 근무를 한다. 언젠가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사는 게 불쌍해."

<타임 푸어>는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베테랑' 여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브리짓 슐트가 썼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가사․휴식 균형 잡기"라는 부제가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시간 관리를 강조하는 통상적인 자기계발서류로 오해할 만한데, 그렇지 않다. 일과 시간에 쫓긴 채 기계처럼 살아가는 지금보다 여유 있고 인간적인 삶을 위한 고민을 풀어내는 데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타임 푸어'는 늘 시간이 부족해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을 뜻한다. 50년간의 시간 연구로 '시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사회학자 존 로빈슨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는 현대인의 생활을 '개미 떼의 질주'에 비유했다.

개미 언덕이 짓밟히면 허둥대면서 헤매는 개미 떼처럼, 아무런 성찰도 없이 내달리기 때문에 시간에 굶주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질주하다가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영원히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겁니다." (28쪽)

'바쁨'은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여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아니면 적어도 바쁘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72쪽)으로 살아가는 데서 생기는 일종의 강박증이겠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한다며 바쁨을 자랑하는 것"(72쪽)처럼 보이거나,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일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72쪽)긴다. 저자는 바쁨이 부러움의 대상이자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인류가 원래부터 '개미 떼'처럼 산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 줄리엣 쇼어에 따르면 4세기 로마에서는 1년에 175일이 축일로 지정돼 있었다고 한다. 중세의 농부와 농노들은 아침식사, 점심식사, 오후 낮잠, 저녁식사 시간에 휴식을 취했고, 오전과 오후에도 잠깐씩 휴식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삶이 변한 것은 시계가 발명되고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3세기부터였다. "시간은 '돈'이 됐고, 고용주들은 시간과 돈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힘"(84쪽)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서서히 증가한 노동시간은 20세기 초입에 하루 15시간, 주 6~7일 근무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바쁨으로 인한 시간 스트레스는 뇌를 망가뜨린다. 저자는 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원용해 지적 능력의 근원지이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뇌 부위(전전두엽)가, 우리가 시간 압박을 받거나 마음이 급하고 무언가에 쫓길 때 수축해버린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런 상태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뇌에서 회백질의 양이 줄어들면(전전두엽 부위가 위축되면-기자 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정리하고, 기억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를 억제하는 능력이 손상된다. 자제력을 잃기 때문에 중독이나 파괴적 행동의 위험도 높아진다. (92쪽)

저자는 시간을 '권력'으로 규정한다. "시간에 쫓길 때, 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힘을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할 때, 쫓기는 삶에 대한 해결책은 고사하고 왜 내가 시간에 쫓기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때"(107쪽) 무력해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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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시간'의 근원을 이해하고 '평온한 삶'의 비밀을 발견해 '권력'을 돌려받기 위해 저자는 '일'과 '사랑'과 '놀이'를 탐색한다. 이 책의 고갱이이자,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타임 푸어' 상태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실증적인 연구 결과와 다양한 현장 사례, 문헌 조사 등을 통해 꼼꼼하게 분석된다.

현대인은 노동과 관련하여 심각한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이상적인 노동자'로 부르는 것이 그것. '이상적인 노동자'는 아이가 태어나도 출산휴가를 쓰지 않는다.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이 생기더라도 끝없이 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벌레'를 최고의 노동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짜 그럴까.

일에 완전히 헌신하는 '이상적인 노동자'라는 규범을 따르려고 애쓰는 노동자들은 항상 불행하며 생산성도 떨어진다. 2011년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의 71퍼센트는 직장에서 감정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독을 느낀다고 답했다. (중략) 직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야근, 실제 업무 효율과 무관한 '얼굴 비치는 시간'을 강요할 경우 창의력과 사고력이 감퇴하고 스트레스, 불안, 우울이 늘어나기 때문에 회사의 건강보험 지출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139쪽)

일을 여유 있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어른 자신의 삶과 자녀 양육, 가정생활에 두루 선순환 작용을 일으킨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자녀의 보육 여건이 안정적인 부모들은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문제해결 능력이 우수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180쪽). 영유아기에 여유 있는 양육자 손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며 자란 아이들은 학교 성적이 좋고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한다.

'타임 푸어'를 조장하는 무의식적이고 편견에 찬 규범들은 또 있다. '이상적인 엄마', '가족을 부양하는 아빠' 등이다. 엄마와 아빠, 나아가 자녀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타임 푸어'의 족쇄에 얽매이게 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은 대부분 직장에 있는 시간인 한낮에 가장 행복하고, 오후 5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 기분이 최악인 '마녀의 시간(witching hour)'을 경험한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아침에 기분이 가장 처지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에 가장 행복해 한다.

저자에 의하면 '좋은 엄마' 콤플렉스나 '완벽한 엄마'라는 환상은 헬리콥터 엄마를 만들어내고, 과잉 모성에 따른 집중 양육을 당연시하게 해 엄마들을 지치게 한다. 특히 과잉 모성은 "일하는 엄마들은 나쁜 엄마라는 강력하고 암묵적이며 때로는 무의식적인 사회적 통념"(286쪽)으로 인해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부모(엄마)의 특정 행동이 아이들의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아이의 미래를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여성들을 억압한다고 한다.

칙센트미하이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아이들, 집안일, 직장일, 잡다한 볼일, 가족 행사 등등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여자들의 상태를 시간이 '오염된다'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상적인 엄마'가 만드는 천국 같은 가정 이미지를 위해 여자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저자의 결론은 여가가 우리 자신을 구한다는 것, 시간의 주인이 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뇌에 휴식을 허용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바쁨을 추방하고 진짜 '당신의 삶'을 살기 등등이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일들이다.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 집 '시스템'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계속 제시간에 출근하고, 아이들 역시 학교와 어린이집에 나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집에는 공동육아, 공동가사 시스템이 비교적 잘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타임 푸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를 갖춘 셈이다.

우리 부부는 '이상적인 노동자'나 '헬리콥터 엄마'와도 거리가 멀다. 아이들이 "극심한 경쟁을 벌이고, 물질적 성공에 높은 가치를 매기고, 성공이란 우리 아이들을 몇 안 되는 명문대에 집어넣는 것"(330쪽)이라고 보지 않는다. 장모님이 우리를 '불쌍하다'고 했으나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유다.

<타임 푸어>(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 6. 19. / 515쪽 / 1,5000원)


○ 편집ㅣ이준호 기자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2219&isPc=true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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