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전우영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알'은 좀비다. 다른 좀비들보다 젊고 잘 생기기는 했지만, 배가 고프면 산 사람의 살과 내장을 뜯어먹어야 하는 좀비다. 그의 몸에서는 좀비 특유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입가에는 사람을 뜯어먹다가 묻은 피가 얼룩져있다. 어느 날 알은 친구들과 인간 사냥에 나섰다가 '줄리'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줄리가 좀비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 먹잇감과 사랑에 빠지다니.
조나단 레빈(Jonathan Levine) 감독의 2013년 작 '웜 바디스(Warm Bodies)'는 인간과 사랑에 빠진 좀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 좀비와 인간은 전쟁 중이다. 좀비들은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들은 좀비를 피해 높은 성벽을 쌓고 살아간다. 가끔 좀비 사냥을 할 때만 밖으로 나갈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과 좀비를 나누는 기준은 몸의 온도다. 인간은 심장이 뛰기 때문에 따뜻한 피가 도는데, 좀비는 심장이 뛰지 않아 차가운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따뜻한 몸들이고, 좀비는 차가운 몸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좀비 알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다. 멈춰있던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알에게서 시작된 이상 증상은 마치 전염병처럼 좀비들 사이에 퍼진다. 좀비들의 심장에 불이 들어오고, 좀비들의 몸은 점점 따뜻해진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좀비들의 행동도 달라졌다. 차가운 손으로 사람들을 공격했던 좀비들은 이제 따뜻한 손으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따뜻한 육체를 갖게 된 좀비들이 이제는 따뜻한 마음까지도 갖게 된 것이다.
로렌스 윌리엄스(Lawrence Williams)와 존 바지(John Bargh)가 2008년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은 좀비만이 아니라 인간도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연구에서 실험 진행자는 실험에 참여할 학생을 심리학과 건물 로비에서 만나 실험실로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실험참여자가 로비에서 진행자를 만났을 때 진행자는 커피가 담긴 컵, 클립보드 그리고 교과서 두 권을 가지고 있었다. 실험실은 심리학과 건물의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험실로 올라가는 도중에, 진행자는 참여자가 실험에 참석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너스 점수를 주기 위해서 참여자의 이름과 참가시간을 클립보드에 있는 참가확인서에 기재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잠깐 동안 커피 컵을 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이 실험의 핵심은 바로 컵에 담긴 커피 온도에 있었다. 한 조건에서는 컵에 따뜻한 커피가 담겨 있었고, 다른 조건에서는 차가운 아이스커피가 들어 있었다. 실험실에 도착한 참여자들에게는 A라는 익명의 개인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주고 인상을 형성하도록 했다. 결과에 따르면, A에 대한 참여자들의 인상은 그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잡고 있던 컵에 어떤 커피가 담겨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따뜻한 커피가 든 컵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아이스커피가 든 컵을 들고 있던 사람들보다 A를 더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의 실험에서는 몸이 따뜻해진 사람들이 실험참여의 대가로 자신이 가지고 갈 수도 있는 선물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양보하는 비율이 물리적 차가움을 경험했던 사람들보다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몸이 따뜻해지면 사람들은 따뜻한 눈길로 타인을 바라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만약 주변에 좀비처럼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어주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알'처럼 달라진 좀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참고문헌
  • Williams, L. E., & Bargh, J. A. (2008). Experiencing physical warmth promotes interpersonal warmth. Science, 322, 606-607.
  • 글. 전우영
  •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에서 사회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적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다양한 사회적 자극이 어떻게 우리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webzine.kpsy.co.kr/2016summer/sub.html?category=13&psyNow=21&UID=162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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