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선생들은 내게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내가 배운 합리적 인간은 다름 아닌 '경제적 인간'이었다. A, B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고른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경제적 인간'의 개념에 한계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른 차원의 인간이 있다는 게 분명했다. A, B 둘 중에 무엇이 더 옳은가를 따져, 옳은 일을 하는 인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에게 '가치적 인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면,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이냐는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간'이 돈으로 대표되는 이득을 중시한다면, 가치적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중시한다. 

한때, 나는 순진하게도 인센티브를 잘만 활용하면, 경제적 인간과 가치적 인간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경제적 선택을 했는데, 이게 또한 가치적으로도 옳은 선택이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A, B 둘 가운데, A가 더 옳은 일이지만, B를 선택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 된다면, A에 인센티브를 주자는 거였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A를 선택하는 게 더 이득이 되도록 만들자는 거였다. 그러면 사람들이 결국 더 옳은 일, 즉 A를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틀린 게 분명했다. 나이가 들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인센티브를 활용하면, 인간은 더욱더 '경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옳은 일을 한다는 '가치적 인간'에서 더욱 멀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과학적 증거도 있다. 이스라엘에서 탁아소 10곳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부모가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면 벌금을 부과했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부모에게 인센티브를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지각하는 부모가 줄어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했다.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 비율이 25%에서 33%로 증가했다. 16주 후에는 40%로 늘어났다. 

이는 부모들이 '가치적 인간'에서 '경제적 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부모들은 탁아소에 지각하지 않은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늦으면 미안해했다. 그러나 벌금이 부과되자 달라졌다. 이득을 따지기 시작했다. 늦게 도착할 때의 이득과, 벌금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벌금을 내더라도 지각하는 게 이득이면, 늦게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러고도 탁아소에 미안해하지 않았다. 벌금을 낸 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내가 쓴 칼럼 '혐오시설 수용 또는 출산장려의 대가로 돈을 주는 정부는 틀렸다(goo.gl/18sBOs)에서 소개한 스위스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설문조사 결과도 똑같은 예다. 산골마을인 울펜쉬엔슨에 방폐장을 짓겠다고 정부가 발표했을 때였다. 주민들의 방폐장 찬성률은 인센티브 제안 전에는 51%였으나, 제안 후에는 25%로 급감했다. 인센티브가 주민들을 가치적 인간에서 경제적 인간으로 바꾼 탓이다. 인센티브를 제안받기 전에는 방폐장을 짓는 게 옳으냐가 판단의 기준이었던 반면, 인센티브를 제안받은 후에는 이득이냐 손해냐가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방폐장을 반대하게 된 거였다. 

방폐장 사례는 경제적 인간과 가치적 인간의 결정적 차이 한 가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전자가 훨씬 더 위험 회피적이라는 것이다. 방폐장 설치가 옳은 일이라고 믿었을 때에는 그 위험을 덜 생각했다. 옳은 일, 다시 말해 가치를 추구하기에 손실 가능성은 덜 따졌다. 반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따질 때는 손실 규모와 그 확률을 자동적으로 따지게 된다. 방폐장이 우리 마을에 유치됐을 경우,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해도 방사능이 유출될 위험, 이에 따른 관광객 감소, 지역 산업의 위축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설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주민들은 '방폐장이 없는 기존 상황도 괜찮아.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방폐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라고 판단하게 된다. 

가치적 인간이 훨씬 더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역사가 입증한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 가치적 인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독립운동을 하면 모든 재산을 잃고 옥살이를 할 수 있으며,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이득을 따지는 경제적 인간에게는 너무 위험부담이 큰일이다. 그러나 '독립'이 옳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위험이 부차적인 거였다.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혁신과 창조를 지향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가치적 인간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혁신적인 창업가와 기업가, 다시 말해 '앙트러프러너(entrepreneur)'가 되려면 어느 정도 위험 감수가 불가피하다. 남이 하지 않는 일, 남이 보기에 이상한 아이디어가 혁신의 시작이다. 그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실현하려면, 위험을 져야 한다. 위험회피적인 경제적 인간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믿는 가치적 인간일수록 더욱더 혁신적인 창업에 뛰어들게 된다. 우리는 그 일의 가치를 믿을 때 심장이 뛴다. 더욱 열정적인 된다. 더욱 끈기를 발휘한다. 더욱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혁신 기업은 돈이 아니라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한다. 페이스북이 사용자 10억 명을 돌파한 2012년 즈음, 직원들 책상 위에 놓였다는 '빨간 책'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페이스북은 기업(company)이 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다. 세상을 오픈하고 연결한다는 사회적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서비스를 만드는 게 아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돈을 번다." 페이스북에서 옳은 일은 세상을 연결하는 거다. 페이스북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옳은 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페이스북에서는 경제적 인간보다 가치적 인간을 우선시한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다. 

미국 애니메이션 기업 픽사에서는 아예 '옳은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직원은 내보낸다. 내가 인터뷰했던 로버트 서튼 스탠퍼드대 교수는 "그런 직원은 남아 있고 싶어도 해고 당한다"며 "애드 캣멀 사장이 그 같은 픽사 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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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옳은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는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다. 혁신 기업 픽사는 이 같은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직원은 내보낸다. <출처= By Joost J. Bakker (Flickr: Do The Right Thing graffiti Amsterdam) [CC BY 2.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via Wikimedia Commons>


가치적 인간은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든다.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들을 돕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를 더 혁신적이고 더 따뜻한 공동체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보다는 가치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난무하는 인센티브에 반대한다. 이는 가치적 인간을 더욱 희귀하게 만든다. 돈으로 누군가가 당신을 조종하려 든다면 거부하라. 그 조종은 인간으로서 당신의 품격을 낮추려는 시도다. 

그러나 가치적 인간 중에 경계해야 할 유형이 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이들은 경제적 인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첫째 타입은 눈이 먼 '가치적 인간'이다. 자신이 옳음에 중독된 나머지, 다른 믿음과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눈이 멀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여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그런 경우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다. 심지어는 테러리스트가 돼 선량한 타인을 학살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이다. 한국의 상당수 권력자들이 역시 알고 보면 눈먼 자들이다. 

둘째 타입은 '내게 경제적으로 이득이면, 그게 곧 옳은 일'이라고 믿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아무 거리낌 없이 추구한다. '그게 옳다'고 스스로를 속인 자들이다. 그러니 남을 속이기도 쉽다. 뻔뻔한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복종하는 상당수 팔로워들 중에서도 이런 타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당한 권력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높은 자리와 많은 돈을 줄 수 있는 권력이라면 그들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 대가로 권력자들이 주는 경제적 이득을 향유한다. 그러면서도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기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득세하고 있을까? 타인의 가치와 믿음에도 눈을 뜨고 존중하는 '가치적 인간'은 점점 소수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경제적 인간이 양산되도록 조직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게도 옳은 일이 아니라 득이 되는 일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그 속에서 타인의 믿음을 부정하는 '눈먼 가치적 인간'들이 독버섯처럼 어두운 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건 아닐까? 부당한 권력에 복종하며 그들의 충실한 집행자 노릇을 하면서도 '이게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 스스로부터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김인수 기자]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6&no=66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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