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의 다양성이 충분한, 그래서 더욱 친근한 저녁 자리에서 "혁신은 BM이다"라고 생뚱맞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한 고급 독일 승용차의 칭송으로 이어졌다. 순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자책감이 몰려오고, 그 대가로 잠시 동안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우리 식으로 편하게 영어를 줄여 부르는 경우는 지천이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그냥 매스컴, 커머셜을 쉽게 시엠(CM), 인텔리겐차를 간단히 인텔리로. 하긴 유학 시절 근처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교포 사회에서 샌프란으로 부르길래 그대로 썼다가 지도교수의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보게 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BM, 즉 비즈니스 모델은 비즈니스 설계도이다. 종종 혼용하는 수익모델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이다. 단순히 제품을 싸고 좋게 만들어 파는 것이 경쟁 우위인 시절에 비즈니스 모델은 용어도 생소했다. 그러나 닷컴의 광풍이 불고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가 등장하며 이들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BM이고 특허도 되고 투자 유치의 기준이며 사업 성공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혁신의 실체로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혁신 역시 제품에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과 프로세스가 포함되어 흔히 3P(Product·People·Process)의 혁신 대상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대다수의 비즈니스에서 제품, 제품에 내재된 상용기술, 그리고 이를 만드는 사람과 프로세스가 얼마나 더 혁신될 수 있을까? 넘쳐나는 선진 경영 기법과 베스트 프랙티스로 조직과 프로세스는 더 이상 창조적으로 파괴되기 어렵고, 국경과 시차 없는 모방과 답습으로 제품과 상용기술은 파괴적으로 창조되기 어렵다. `혁신은 이런 것이다`라고 외치며 제품과 기술 혁신에 목매던 한 기업은 인수 대상조차 찾지 못해 역사에서 사라질 판이다. 현실은 그런 것이다. 

혁신은 BM이다. 더욱이 와해적 혁신을 바란다면 BM부터 쳐다보아야 한다. 근자에 대성공의 스토리를 쓴 기업들은 모두 혁신을 비즈니스 모델에서 찾았다. 급변하는 고객 니즈와 유통 옵션, 다양한 기술 대안과 세계 도처의 협력업체. 이들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엮고 지탱하느냐가 관건이고 바로 혁신 자체이다. 

한번 각자 종사하는 업종의 새로운 스타들을 떠올려 보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기업들이다. 이제 혁신의 대상은 BM이고, 혁신의 청사진이자 모습도 BM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M에 대한 고민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연구는 시장, 유통, 생산뿐 아니라 재무와 기술에 대한 이해를 겸비해야 한다. 폭넓은 분야를 넘나들며 혁신과 창조를 잉태하는 진정한 융합 분야인데도, 이에 대한 노력은 부족하다. 대학에는 많은 수의 특화기술연구센터가 있고, 또 그만큼의 창업지원단이나 창업동아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술 사업화에 막히고, 창업 아전인수에 빠진다. 대학의 인력 양성에 융합을 원한다면, 그리고 대학의 연구개발에 현실감을 바란다면 대학이 BM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이를 각종 분야로 적용해보는 교육을 하게 해야 한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도 BM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술분류 체계에 근간한 CPND식 발상은 버리자. 정보통신기술(ICT)이 일반적인 과학기술과 다른 것은 ICT는 기술 간의 융합자이자 산업 간, 산업 내 협업, 기업과 고객의 연결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대로가 BM의 속성과 다를 바 없다. 혁신의 BM 관점으로 ICT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잘나가는 하나의 과학기술 분야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전 정권에서 일개 산업으로 치부되었던 것을 아직 잊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시장과 사용자의 눈높이로 SBS를 채택하자. 소프트웨어, 비즈니스 모델, 서비스 이렇게 SBS로 부르자는 얘기다. 

이래저래 영어는 유용한 언어이다. 

[임춘성 객원논설위원·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


출처: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5&no=554149

Posted by insight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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