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 전략,마케팅 아모레퍼시픽의 성공 요인 1) 미와 건강(Beauty & Health) 등 본업에만 집중했다. 2)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3) 중국 시장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심었다. 4) 소비자의 트렌드 변화를 미리 읽어서 유통망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
편집자주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정완(경희대 경제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1932년 서성환 창업주의 어머니 윤독정 여사가 개성에서 머릿기름을 만들어 팔면서 출발했다. 서성환 창업주는 1945년 9월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세웠고 처음으로 상표를 붙인 메로디크림(1948년)과 식물성 원료를 사용한 ABC포마드(1951년) 등을 팔았다. 경쟁 업체들과는 달리 메로디크림은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고급 원료를 사용했고 ABC포마드에는 당시 제품에는 드물게 향료를 섞어 제작했다. 제품명도 ‘메로디(Melody)’와 ‘ABC’ 등 부르기 쉬우면서도 당시에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 소비자를 파고 들었다. 1954년 8월에는 국내 화장품업체에서는 처음으로 자체 연구실을 만들었다. 1958년 8월 국내 최초 월간 미용 정보지 <화장계>를 창간했고 1966년에는 세계 최초의 한방 화장품인 ‘ABC인삼크림’을 출시했다. ‘최초’의 행진은 경쟁이 치열한 업계에서 강력한 무기였다. 아모레퍼시픽은 초창기부터 꾸준한 자체 제품 개발로 대기업 계열의 화장품회사와 경쟁하면서 오랫동안 업계 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1997년 출시한 설화수 윤조에센스는 누적 판매액이 1조 원을 웃돌았다. 아리따움 모디네일과 아이오페 에어쿠션은1000만 개 이상 팔렸다. 특히 최근의 경영 성과가 두드러진다. 이 회사 주가는 2014년 12월 초 250만 원을 웃돌기도 했다. 모기업인 아모레퍼시픽 시가총액만 13조 원을 넘는다. 아모레퍼시픽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80년 이상 한 우물만 판 끈기와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파산의 위기에 처할 만큼 어려웠던 시기도 분명 존재했다. 실제 서경배 대표이사가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던 1990년대 초반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1973년73%에 달했던 시장점유율은 1991년 19%까지 떨어졌다. 과도한 외형 확대로 매일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를 상환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화장품 수입 개방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 화장품과의 경쟁도 치열하게 벌여야 했다. 유통망 개방으로 국내 화장품 시장의 30% 가까이를 순식간에 해외 화장품업계에 내줬던 시기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순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경기불황과 전반적인 화장품 업계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2014년 1∼9월 매출액 2조8952억 원에 순이익 3411억 원을 기록했다. 2013년에는 매출액 3조1004억 원과 당기순이익 2674억 원을 기록했다. 아모레퍼시픽의 성장 전략을 DBR이 집중 분석했다.
본업에 바탕을 둔 외연 확대 1970∼1980년대 한국 산업계의 화두는 ‘사업 다각화’였다. 아모레퍼시픽도 문어발식 확장을 꾀했다. 1974년 부동산 관리회사인 장원산업을 세웠고, 1976년 아천개발과 서울악기를 인수했으며, 1977년 태평양금속을 설립했다. 1983년 충무기획을 인수해 동방기획으로 사명을 바꾸고 광고업에도 진출했다. 1983년에는 의약품사업부를 독립시켜 태평양제약을 출범시켰다. 1987년에는 프로야구구단 청보핀토스를 인수해서 태평양돌핀스를 창단했다.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1982년 동방증권을 인수했고 홍일상호신용금고, 동방경제연구소, 동방투자자문, 태평양생명보험을 잇달아 세웠다. 1990년대 초 아모레퍼시픽은 생활문화 소비재와 금융 및 서비스, 기술 및 산업 소재, 육영 및 문화 등 4개 사업군에 걸쳐 25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중견 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본업을 뺀 나머지 사업은 대부분 부진했다. 계열사들은 적자에 허덕일 때가 많았다. 본사와 계열사는 지급 보증 등으로 재무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계열사의 어려움은 본사에 즉시 영향을 끼쳤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1991년 12월 모기업보다 덩치가 더 크고 3년 이상 흑자를 내던 태평양증권을 팔았다. 당시 증권업은 규제산업이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겨졌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이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어서 1994년 태평양 프랑세아, 1995년 한국써보 등을 정리했다. 국내 화장품 업계는 1990년대 초반 큰 변화를 겪었다. 해외 화장품업체들이 본격적으로 국내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후발업체들이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한국화장품 등 메이저 3사의 시장점유율은 1991년 60.6%에서 1995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아모레퍼시픽은 1995년 태평양돌핀스를 현대그룹에 넘겼고 증자를 해주는 방식으로 돈을 더 얹어서 태평양패션을 1997년 1월 거평그룹에 넘기는 것으로 1차 구조조정을 마쳤다. 경영진은 흑자기업까지 내다 팔면서 본업에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현재 흑자를 내며 당분간 큰 문제가 없는 사업이라도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와 아이오페 레티놀 2500 등의 잇단 성공으로 1997년 외환위기를 버틴 아모레퍼시픽은 2차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1차 구조조정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2차 구조조정은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게 목적이다. 화장품의 사업영역을 다소 확장해서 미와 건강(Beauty & Health) 분야를 뺀 나머지 사업은 모두 정리했다. 한국태양잉크(1998년), 동방상호신용금고(1999년), 태평양생명(1999년), 동방커뮤니케이션즈(2000년), 태평양정보기술(2000년), 바이오랜드(2004년), 태평양금속(2004년) 등을 잇달아 정리했다. 태평양정보기술은 구조조정 당시 IT 버블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바이오랜드는 화장품 관련 원료 기업으로 원료 공급업체이기 때문에 잔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원료산업에 강점이 있는 다른 기업과 파트너십을 통해 원료를 조달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2차 구조조정 결과 아모레퍼시픽의 계열사는 아모스, 에뛰드, 빠팡 에스쁘아(향수) 등 화장품 계열 회사와 태평양제약, 퍼시픽글라스, 장원산업(녹차) 등 비화장품 계열 건강 관련 회사 등 6개 기업으로 정리됐다. 모두 미와 건강(Beauty & Health) 분야에 속했다.
지속적인 브랜드 정체성 확립 1990년대부터 국내 화장품 시장은 공급 과잉 상태였다. 또 2000년대 들어 IT 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시장 상황도 급변했다. 경쟁 강도가 높아지면서 아모레퍼시픽은 강력한 브랜드 자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글로벌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과 에스티로더는 다양한 국가의 화장품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인수하면서 몸집을 키웠다. 관리하는 브랜드만 수백 개에 달했다. 로레알은 2000년 Kiehl’s, 2006년 The Body Shop, 2012년 Urban Decay 등을 인수했다. 에스티로더도 1994년 M·A·C, 1995년 Bobbi Brown, 1997년 Aveda, 2010년 Smashbox 등을 넘겨 받았다. 다만 두 기업은 사업구조가 다르다. 로레알은 저가에서 고가까지 모든 제품을 구비하고 있다. 반면 에스티로더는 고가 제품 위주다. 아모레퍼시픽은 시장점유율을 고려할 때 모든 가격대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브랜드 전략을 세우기로 했다.
아모레퍼시픽은 과거에도 파워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섰을 뿐 브랜드 수명은 1년 반에서 3년 정도에 그쳤다. 무작정 브랜드를 양산한다고 해서 마케팅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브랜드의 고객층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서 영역 충돌이 생기기도 했다. 불필요한 경쟁 등 낭비적인 요소도 많았다. 브랜드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먼저 각 브랜드마다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모든 브랜드를 콘셉트와 고객층, 가격 등에 따라 분류하고 서열을 매겼다. 1999년 외부 마케팅 업체에 의뢰한 결과 기업 브랜드인 태평양과 아모레, 개별 제품 브랜드 등이 뒤섞여서 소비자에게 브랜드 이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제품 브랜드인 아이오페와 헤라에는 기업 브랜드가 부정적인 영향까지 끼쳤다. 모 브랜드인 아모레는 기업 브랜드에 가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콘셉트가 불분명하고, 상호 잠식현상이 발생하며, 매출이 미미한 브랜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또 아모레는 더 이상 제품 브랜드로는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든 브랜드를 콘셉트와 연령대, 가격대 등으로 분류하고 브랜드 전략 지도를 만들었다. 일부 브랜드는 리뉴얼 작업을 통해 고객층을 바꿨다. 마몽드는 1991년 11월 방문판매를 하지 않고 유통점으로만 판매하는 최초의 브랜드로 출시됐다. ‘산소 같은 여자’를 광고문구로 내세워 20대 여성을 겨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4년 국내 화장품 브랜드 최초로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1994년 고객층이 겹치는 라네즈가 출시되자 매출이 크게 줄었다.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두 브랜드 모두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1998년 마몽드는 핵심 고객층을 30대로 높였다. 그 결과 마몽드와 라네즈의 잠식현상이 사라졌고 모두 아모레퍼시픽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모레퍼시픽은 2002년 브랜드 전략 지도를 바탕으로 설화수, 헤라, 아모레퍼시픽, 리리코스, 아이오페, 마몽드, 라네즈, 이니스프리, 에뛰드, 미쟝센 등 10개 브랜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거나 10개 브랜드의 서브라인에 두도록 했다.
물론 이런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뒤에도 위기는 항상 찾아왔다. 마몽드는 2010∼2012년, 한율은2011∼2013년 매출이 감소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어떤 브랜드가 될 것인가’라는 아이덴티티 차원에서 해법을 모색했다. 마몽드는 2012년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꽃’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브랜드 콘셉트와 스토리가 약했고 히트상품도 딱히 없었다. ‘꽃’이라는 브랜드 모티브가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브랜드 컬러를 꽃을 연상하기 좋은 ‘노란색’으로 바꾸고 매장의 외관과 출입구, 포장 등에 꽃을 배치하거나 적용했다. 2013년 마몽드는 전년 대비 매출액이 13% 성장했다. 한방화장품 한율은 ‘이모 화장품’이나 ‘엄마 화장품’의 이미지가 강했다. 광고 모델도 40대였으며 용기 디자인은 다소 진부했으며 로고는 궁서체였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전래민방(korean medicine), 늙지 않는(ageless), 글로벌(global)로 바꿨다. 20∼30대를 겨냥한 프리미엄 한방 화장품으로 포지셔닝을 하고 젊은 모델을 기용했다. 2014년 한율의 매출이 성장세로 전환됐다. 아모레퍼시픽 경영진은 2014년 1월 설화수와 라네즈, 마몽드, 이니스프리, 에뛰드 등 5개 브랜드를 2020년까지 중점적으로 육성할 ‘글로벌 챔피언 브랜드’로 선정했다. 5개 브랜드를 중심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 밖에도 헤라, 아이오페, 려 등 20여 개의 기타 다양한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브랜드끼리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있다.
프리미엄 마켓부터 공략 아모레퍼시픽은 1964년 8월 화장품 20여 종을 에티오피아에 처음 수출했다. 1970년대에는 일본, 홍콩,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진출했다. 당시에는 수입상을 통한 간접 수출이 대부분이었다.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1986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에 현지 지사를 세웠다. 1990년에는 프랑스 샤르트르시 소재 공장을 매입하기도 했다. 해외 시장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나 1980년대까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국산 화장품이 선진국에서 인기를 얻기가 쉽지 않았고 아시아 시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1994년 2월 중국 선양에 ‘태평양보암화장품유한공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진출했으나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고 화장품 수요가 예상처럼 커지지 않았다. 1997년 현지 수입 판매상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고 판매를 강화했으나 실적은 호전되지 않았다. 판매상이 단기 실적에만 매달려 오히려 브랜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우려해야 할 정도였다. 아모레퍼시픽은 발빠른 구조조정으로 1997년 금융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자신감까지 얻었다. 이후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경영진은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할 시기라고 봤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시장은 부담스러웠다. 중국을 다시 바라봤다. 중국의 개방정책이 가속화하면서 100% 외국계 법인의 설립이 가능해졌다. 중국의 화장품 시장은 자본력과 브랜드 파워를 갖춘 로레알, 시세이도, P&G 등 글로벌 화장품 업체들이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며 2000년 이후 연평균 12.6%(2000∼2009년)나 성장했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겨진 화장품이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지 화장품업체인 상하이가화도 1984년 모든 라인을 구비한 브랜드를 겨우 출시했다. 하지만 화장품 산업에 대한 규제가 풀리고 소득이 크게 늘자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국 시장은 P&G, 로레알, 메리케이, 시세이도 등 상위 10대 글로벌 브랜드 기업들이 중국 전체 시장의 약 55%를 차지하고 나머지 시장을 두고 수천 개의 군소 화장품 브랜드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유통망은 백화점, 대형 슈퍼마켓, 방문판매가 전체 매출액의 70%를 차지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처음부터 고가 정책을 고수했다. 고가 브랜드란 지위를 가져야 이후 중저가 시장으로도 외연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기 때문이다. 중저가 브랜드로 인식된 상태에서 고가 화장품으로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봤다. 수익도 고가 화장품이 훨씬 컸다. 하지만 당시 컨설팅업체들은 이런 전략이 위험하다며 우려했다. 브랜드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화점 중심의 고가 시장 진입 전략의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컨설팅사들은 메이저 화장품 업체들을 피해서 중저가 시장을 먼저 공략하는 게 순서라고 조언했다. 백화점에 매장을 내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매장을 찾는 고객에게 일일이 브랜드를 설명하고 제품을 팔려면 시간이 꽤나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진은 고가 시장 선진입 전략을 고집했다. 오래 걸려도 현지 시장에서 생명력을 이어가려면 프리미엄 이미지를 고수해야 한다고 봤다.
사실 경영진은 화장품의 품질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화장품은 인종과 현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인종별로 피부상태가 비슷하고 주로 사용하는 화장품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지역별로 화장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같은 문화권의 화장품 업체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실제 동양인들은 스킨 제품을 많이 구입한다. 실제 아시아 화장품 시장에서는 매출의 80%가 피부와 관련된 제품이다. 동양문화권은 전통적으로 피부가 좋은 사람을 미인으로 꼽아왔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인들은 향수를 많이 찾는다. 남미권에서는 손톱, 머리와 관련된 제품의 수요가 많다. 아모레퍼시픽은 국내 시장에서 이미 오랫동안 피부와 관련된 화장품을 숱하게 개발해왔다. 기후조건 등을 고려할 때 동양인의 피부특성에는 어떤 제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글로벌 화장품 업체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경영진은 고가 시장 선진입 전략을 고집했다. 오래 걸려도 현지 시장에서 생명력을 이어가려면 프리미엄 이미지를 고수해야 한다고 봤다. 아모레퍼시픽은 2000년 11월 상하이 현지 법인을, 2002년 7월 현지 공장을 세웠다. 당시 전략은 단기 매출 확대보다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주력하면서 거점 도시의 주요 백화점에 매장을 개설해 ‘라네즈’를 고급 브랜드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었다. 2002년 라네즈와 고객층이 가장 유사하다고 분석되는 상하이 팍슨백화점에 1호점을 열었다. 하지만 매장은 판매에 유리한 1층이 아닌 2층에 개설되는 등 낯선 브랜드이기 때문에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판매도 매우 부진했다. 타개책은 광고가 아닌 판촉이었다.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사용 기회를 늘린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국내에서 프로모션을 담당하는 직원 5∼6명을 파견해서 하루 종일 프로모션을 열었다. 난타공연, 마술, 춤 등의 프로그램을 메이크업 시연과 함께 보여주자 고객들은 라네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입소문도 퍼졌다. 매장은 곧 1층으로 내려왔다. ‘Made in Korea’의 원산지 효과를 위해서 2004년 10월부터 라네즈는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팔았다. 라네즈는 이후 현지화 전략과 한류 등에 힘입어 2005년까지 33개 도시 83개 백화점에 입점했다. 하루 매출이 5000만 원을 넘는 매장도 등장했다. 2007년부터 흑자를 기록하며 안착했다. 중국 시장 진출은 한류 바람과 중국의 경제수준 향상과 맞물리면서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외부 환경의 수혜가 중국 진출의 성과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LG생활건강 등 다른 국내 화장품 업체들도 중국에 진출했으나 아모레퍼시픽만큼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좀 더디더라도 고급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2010년까지 2개 브랜드만 집중적으로 키웠다. 라네즈는 젊은 층이 선호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고 마몽드는 라네즈보다는 다소 가격이 싸지만 대중적인 제품보다는 다소 비싼 제품으로 포지셔닝을 구축했다. 또 고급 백화점을 유통망으로 활용해서 절대적인 브랜드 파워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라네즈는 중국 여성의 최대 관심사인 ‘보습’에 착안해 ‘수분’ 콘셉트를 강화하면서 성과를 이어갔다. 국내 백화점에서 중국인들이 1순위로 구매하는 제품이 라네즈일 정도로 현지에서는 이미 파워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아모레퍼시픽은 2011∼2013년 한방 브랜드인 ‘설화수’와 중저가 브랜드인 ‘이니스프리’ ‘에뛰드’를 현지에 출시하면서 중저가까지 모두 포괄하는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또 아직 해외 무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잠재력을 갖춘 브랜드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아이오페와 헤라는 국내 시장에서 매출액이 3000억 원에 가까운 대형 브랜드다. 국내 면세점에서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시장점유율은 아직 2∼3%에 불과하다. 하지만 2014년 2분기 매출 성장률은 18.5%에 달한다. 2013년에만 중국에서 3387억 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소비자의 움직임을 미리 읽다 소비자가 선호하는 유통망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바뀐다. 아모레퍼시픽은 새로운 유통망을 선점해서 시장점유율을 높인 사례가 많다. 아모레퍼시픽은 창업 초기부터 소비자들이 어떤 유통망을 선호하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64년 9월 일본의 화장품업체인 폴라의 방문판매를 차용해서 이를 국내에 도입했다.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잘게 쪼개 화장품 특약점을 설치했고 6·25 전쟁 이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미망인을 판매원으로 고용했다. 1980년 특약점과 영업소만 664곳, 판매원은 1만6571명에 달했다. 1985년은 국내 전체 화장품 매출의 85% 이상이 방문판매를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1977년 대구에 처음 등장한 화장품 할인 코너는 빠른 속도로 방문판매 시장을 잠식했다. 더군다나1984년 3월 ㈜럭키(현 LG생활건강)가 ‘드봉’ 화장품을 출시하고 화장품 사업에 다시 진출하면서 방문판매가 아니라 화장품 할인 코너 등 시장판매에 전력을 투구했다. 당시 시장판매에는 따로 임자가 없었다. 방문판매는 하락세를 걸었고 시장판매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