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구실 못하는 의료분쟁중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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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윤소민 씨(가명·35)에게 2011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해다. 멀쩡하던 아버지가 강남의 한 대형병원에서 간단한 시술을 받던 도중 갑자기 쇼크가 왔다. 그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가족들과 끝내 작별인사도 못하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63세였던 아버지는 고혈압과 동맥경화로 수년간 이 병원을 다니던 터였고, 담당의사 권유로 시술이나 수술 대신 약물치료를 받았으며 병세도 호전됐다. 문제의 2011년, 담당의사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 새로운 주치의가 배정됐다. 새 담당의사는 곧바로 스텐트 시술(심장에 스텐트를 넣어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시술)을 권했다. 아버지는 남들도 다 하는 시술이라 큰 걱정 없이 시술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가족들은 곧바로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료중재원)을 찾았다. 하지만 해당 병원이 조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중재원 조정절차는 시작도 못하고 무산됐다. 윤씨는 “너무 황당했다”며 “상대방이 조사를 안 받겠다고 하면 그만인 제도가 왜 존재하는지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의료사고로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선 변호사 비용이 기본 수백만 원이다. 여기에 환자 본인(고소인)이 병원 측 의료과실을 입증할 책임을 진다. 따라서 변호사를 통하든 본인이 직접 하든, 병원 측 의료과실을 입증할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법원은 이에 대해 공인된 기관에 감정을 받도록 지시한다. 감정 비용도 환자 측 부담이며, 금액은 수십만~수백만 원에 달한다. 수십만 원대의 인지대와 우편송달료 등도 환자 측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다. 게다가 소송은 단기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짧으면 1~2년, 길게는 3~4년이 소요된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변호사 비용은 눈덩이처럼 늘어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 환자 가족들은 소송 기간 중 극심한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결과를 절대 장담할 수 없는 게 의료소송이다. 25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분쟁과 관련한 총 1143건의 소송(1심 재판 기준, 소액사건 제외)에서 대부분 환자 측인 원고가 100% 승소한 경우는 고작 20건(1.7%)이었다. 환자 측이 일부라도 승소한 경우는 306건으로, 26.7%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환자 측이 패소하거나 소취하·합의 또는 각하로 결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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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의료중재원을 활용하면 소송과는 비교가 안 되게 부담이 줄어든다. 

보상금 요청 금액이 500만원 이하인 경우, 환자 측은 수수료 2만2000원만 내면 된다. 보상금 요구액이 1억원이면 수수료는 16만2000원이다. 환자 부담이 거의 ‘공짜’ 수준인 의료분쟁조정제도는 분명 일반 서민들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2011년 국회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을 통과시켰고 2012년부터 의료분쟁조정제도가 공식 시행에 들어갔다. 소송은 엄두도 못 냈던 일반 서민들에게 의료분쟁조정제도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환영받았다. 

환자 입장에선 비용 부담이 거의 없는 데다 조정절차 개시 이후 90일(최장 120일) 이내에 조정결과가 나오는 만큼 시간 지연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고통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조정신청서와 경위서, 신분증 등만 내면 신청이 가능하고 병원 과실 입증과 감정도 의료중재원이 담당하는 만큼 환자 권익 보호를 위한 최상의 방안이란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시행 2년이 지나도록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지난달 27일 가수 신해철 씨 사망사건을 계기로 비판 목소리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 고 신해철 씨 유가족은 “이번 사건은 의료중재원에 조정을 신청할 사안이 아니다. 신청한다 해도 병원 측이 응하지 않아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며 회의론을 제기했다. 유가족은 곧바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8월엔 대학병원 응급실 치료 도중 숨진 고 전예강 어린이(9) 가족이 의료중재원에 조정신청을 냈으나 병원 측이 응하질 않아 조정절차가 무산되기도 했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오광균 변호사는 “고도의 전문 지식을 요하는 의료 소송에서 환자 측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며 “병원 측이 응하지 않으면 중재절차 개시가 안 되는 현재의 중재 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의료분쟁조정법은 신청인이 조정 신청을 해도 병원 등 피신청인이 14일 이내에 동의하지 않으면 조정절차가 자동 각하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오 변호사는 “언론중재위원회와 환경분쟁조정위원회, 한국소비자원 등의 분쟁 제도엔 없는 이상한 규정이 의료중재원 제도에 있다”고 꼬집었다. 법무법인 로앤의 박미선 변호사도 “의료중재원을 설립한 의도를 생각한다면 피신청인 동의 규정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해 의료중재원에 중재·조정을 요청한 신청건수는 총 1398건에 달했지만, 이 가운데 실제 절차가 시작된 건수는 551건에 불과했다. 조정절차 개시율이 고작 39.4%다. 중재를 신청해도 60% 이상은 절차 개시도 못한 채 끝나고 마는 셈이다. 

김소윤 연세대 의대 교수는 “환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신청과 동시에 강제적으로 조정절차를 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남기현 기자]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146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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