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난 집 맛난 얘기]
서울 상암동 <서동한우>
소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연도, 향미, 다즙성이다. 소고기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 세 가지가 뛰어난 고기를 먹은 것이다. 연도는 부드러운 정도, 향미는 혀와 코로 느끼는 맛과 냄새, 다즙성은 고기를 씹을 때 수분과 지방이 유출되면서 입안에 즙액이 늘어나게 하는 성질이다. 숙성 기술은 소고기에서 이 세 가지 요인을 높여 육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이다. 최근 다수의 고깃집이 숙성육을 취급하고 있다. 고급화된 고객의 입맛을 맞추고 차별화한 맛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최근 한우의 독보적 건조숙성법(드라이에이징)으로 세간에 알려진 충남 부여의 <서동한우>가 서울 상암동에 진출했다.
한우, 이젠 지방 아닌 단백질로 먹읍시다!
<서동한우>는 근내지방도(마블링) 중심의 기존 한우 등급판정 체계에 동의하지 않는다. 등급이 높을수록 지방이 잘 발달한 고기일 뿐, 맛이 더 좋은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집의 숙성육 원육은 1~2등급 한우 암소다. 기존 한우등급체계의 시각으로 보면 높은 등급은 아니다. 높은 등급 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방 함량이 낮을 뿐 육질이 나쁜 고기는 아닌 것이다. 축산학을 전공하고 20년 경험을 쌓은 유인신 대표가 직접 건조숙성에 적합한 양질의 한우를 선별한다. 같은 등급의 암소 한우여도 사육 과정과 원육 상태에 따라 숙성 후 육질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기 볼 줄 아는 눈’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 서동한우 한우
1++등급은 3등급 소기에 비해 마블링이 발달했다. 가격도 더 비싸고 고급육으로 인정받는다. 축산 농가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곡물사료를 급여하고, 소비자는 불에 녹은 지방의 고소한 맛과 부드러움으로 고기를 먹어왔다. 이런 등급제도는 부지불식간에 마블링이 발달한 기름진 소고기 선호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소고기의 진정한 맛은 하얀 지방이 아닌 붉은 고깃살 즉, 단백질에서 느껴야 한다는 것이 이 집의 주장이다.
원래 단백질 자체는 아무 맛이 없다. 그러나 숙성 과정을 통해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여러 아미노산으로 변한다. 고기에서 느끼는 감칠맛은 바로 이 맛이다. 감칠맛을 이끌어내는 숙성에는 습식(또는 진공)숙성과 건조숙성이 있다. 둘 다 맛과 연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시중 대부분의 숙성육은 습식숙성을 거친 고기다. 건조숙성법은 조건이 까다롭고 수율이 낮아 흔치 않다.
<서동한우>의 건조숙성법은 기간과 원육 손질형태가 기존 숙성육과 다르다고 한다. 이 집은 30~50일, 심지어 최장 90~120일까지도 숙성시킨다. 물론 숙성을 오래 시켰다고 육질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다만 기간이 길면 그만큼 원하는 육질에 가깝게 숙성시킬 수 있다. 하지만 부패나 오염을 방지하면서 숙성상태를 오래 유지시키려면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여기에 유대표의 건조숙성법 기술의 진가가 숨어있다.
숙성에 들어가는 원육의 형태를 분할육이 아닌, 이분도체(도축한 소 한 마리를 두 쪽으로 가른 것)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도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그만의 기술이다. 숙성실 입고 전 분할하느라 칼을 대면 댄 곳마다 공기와 잡균이 들어가 숙성에 실패하기 쉽다. 이분도체 상태로 숙성시키면 그런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다. 물론 살 속 깊숙한 곳까지 숙성효과가 미쳐야 하고, 오묘한 온도, 습도, 시간, 그밖에 숙성실 환경 조절 요소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여야 가능한 얘기다.
지방 떼고 껍질 벗긴 숙성육, 배기관 없이 구워
건조숙성육은 숙성과정에서 외기에 노출된 부분이 검게 변색되어 상품가치가 없다. 또 숙성기간이 길다 보니 고기 육량도 줄어든다. 손님에게 고기를 내기 전에 육부장이 과일 껍질을 벗기듯 겉 부분을 깔끔하게 도려낸다. 이때 지방도 함께 제거한다. 숙성과정에서 한 번, 고기 다듬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모두 두 번 로스가 발생한다. 건조숙성육 원가가 높은 이유다. 건조숙성육은 몇몇 고급 전문점이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형태로 선보였다. 이 집에선 스테이크가 아니라 숯불에 구워먹는 일반 고깃집 스타일이다.
건조숙성등심&채끝(150g 4만3000원)은 30일 이상 건조 숙성시킨 숙성육이다. 이 집의 기본 메뉴다. 채끝은 써는 방향에 따라 육질과 고기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숙련된 육부장이 최대한 육즙을 가둔 형태로 썰다 보니 깍두기 같은 정육면체 모양이 됐다. 명품건조숙성(150g 5만5000원)은 50일 이상 최장 120일까지 건조 숙성시킨 등심, 안심, 채끝 가운데 상위 5%만 엄선한 숙성육이다. 좀 더 색다른 맛을 원한다면 건조숙성 티본(100g 3만원), 특수부위모음(150g 3만5000원)도 있다.
두 번 구워낸 강원도산 고급 참숯에 등심과 채끝을 구웠다. 완벽한 숯과 고기의 만남, 서로가 서로의 몸을 잘 안다. 아무리 구워도 그을음이나 잡내 등 불협화음이 없다. 여기에 불 높이 조절레버가 달린 숙성육 전용 불판은 최적의 상태로 고기를 구워준다. 이 집에는 고깃집에 당연히 있어야 할 덕트용 배기관이 없다. 고기를 구워도 신기하게 연기가 나질 않는다. 불판에 시커멓게 눌어붙지도 않는다. 고기 구울 때 생기는 연기나 그을음은 대개 지방 성분이 타면서 발생한다. 이 집 고기는 애초부터 지방이 적은 고기인데다 완벽한 드라이 에이징을 거쳤다. 그러니 연기나 냄새를 빼기 위한 배기관이 필요 없는 것이다. 배기관이 가로막지 않아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후식으로 식사를 원하면 육회비빔밥+된장찌개(9500원)가 좋다. 역시 한우 육회에 한우 갈비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여서 가격 대비 만족도가 매우 높다. 시원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면 물냉면+수육(8000원)이 괜찮다. 국내산 한돈 수육과 한우로 뽑은 육수 냉면이 개운한 맛을 낸다.
환상적 치즈 풍미, 반찬과 소금조차 방해물
연기나 매캐한 냄새는 없지만 차츰 고기가 익으면서 치즈 향내가 났다. 수많은 고기를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치즈 향을 노골적으로 팍팍 내뿜는 고기는 없었다. 숙성이 끝나면 줄어든 만큼 고기의 맛 성분들이 농축되어 맛이 풍부하고 깊어진다. 숙성육 전문가들이 건조숙성 소고기에 대한 맛을 서양식 향미어로 표현한 것을 보면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buttery(버터향 나는), mellow(부드럽고 풍부한, 그윽한) intense(극심한, 강렬한) earthy(구수한) nutty(견과 맛 나는) 등이다.
이 집에는 일반 고깃집에서 내놓는 마늘과 고추가 없다. 진귀한 향미를 내는 숙성육 앞에서 마늘과 고추는 훼방꾼일 뿐이다. 저염과 무조미료로 만든 여러 가지 반찬을 정갈하게 차렸다. 하지만 반찬에 손대지 말 것, 소금도 찍지 말 것, 오직 고기에만 집중할 것이 이 집에서의 고기 먹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치즈를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와인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강한 치즈 향미에 자극받은 초기 고객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한우 고기를 먹다가 어떤 손님이 와인을 찾았다. 손님들 요구에 따라 이 집에서도 자연스럽게 와인을 들여놓았다. 출입문 앞에 다양한 와인이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 집 인근에 각종 방송사와 유관 기관들이 많다. 전문 방송인과 매체 종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2층에는 4인실부터 12인실까지 개별방을 마련했다. 편안한 개별 공간에서 여유있게 고기를 즐길 수 있다. 최대 80명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 세미나나 각종 기념 모임도 가능하다.
한우 숙성육이 7세기에도 존재했더라면 백제 무왕, 서동이 그 고생을 하지 않고도 선화공주를 취했을 것이다. 진평왕에게 예를 갖추고 폐백으로 숙성육을 바쳤더라면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을까? 이후 전개된 나제간 지루한 다툼도 없었을 테고… 모처럼 만난 고급 숙성육을 씹으며 맛난 상상을 해본다.
<서동한우>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332 청운빌딩, 02-302-0022
기고= 글,사진 이정훈
출처: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19/20140919016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