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소비자 선택권을 보장하는 만족감이 가장 큰 이유죠. 내 돈은 소중하니까요.” 국내 대표적 여성 경제학자이자 해외 직구(직접구매)의 ‘1세대’격인 A교수(58)가 설명한 직구 열풍의 이유다. A교수는 ‘최고경영자(CEO)의 교복’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외국 의류 브랜드를 구매하기 위해 이미 10년 전부터 직구를 애용해왔다. 그는 미국 최대 쇼핑 대목인 ‘블랙프라이데이’가 가져온 한국사회의 직구 열풍을 ‘가치소비’로 설명하며 일회성 유행이 아닌 ‘소비자 혁명’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① 알뜰 소비
“불황에 내돈은 소중하니까” 직구시장 4년새 4배이상 껑충
저렴한 가격의 신상품에 수요자는 지갑을 절로 열고, 공급자는 넘치는 일감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글로벌 소비 침체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고학력과 디지털 마인드로 충만한 소비자들의 해외 직구 열기가 뜨겁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쇼핑 시즌이 한국사회에 몰고 온 직구 열풍의 배경과 시장 잠재력에 대한 전문가들 평가는 대체로 일치했다. 해외 직구 ‘얼리어답터(신상품 등의 초기 수용자)’임을 자임하는 A교수 사례처럼 직구 열풍은 연말 ‘반짝 유행’을 넘어 소비자 후생을 극대화하는 유통·소비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일치된 평가다. 해외 직구 시장은 2010년 이후 4배 이상 불어나며 1조원 넘는 시장을 형성했다. 지난달 30일 관세청에 따르면 해외 직구 등을 통해 통관된 전자상거래 물품 금액은 올해 12억2700만달러(10월 기준)로 이미 지난해 연간 규모(10억4000만달러)를 넘어섰다. 관세청 관계자는 “해외 직구가 11~12월 연말께 급증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올해 증가세가 더 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직구 시장의 가파른 성장을 설명하는 첫째 요인으로 ‘착한 가격’과 ‘짠돌이 소비자’를 언급한다.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살림살이를 이코노마이즈(절약)하려는 가계의 심리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직구 시장의 성장은 역설적으로 가계의 눈물 어린 노력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저렴한 가격에 스마트폰, 청소기 등 해외 리퍼비시 제품을 이른바 ‘광클릭’하는 직구족들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10년 전에도 이뤄졌던 직구가 최근 들어 부쩍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해외 배송업체 간 경쟁 등 우리 소비자들이 비용으로 생각했던 요소들에 대한 부담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배송비와 관세 부담이 줄어든 상황에서 아마존 사이트를 찾은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는 국내 제품보다 30~50% 저렴하게 올라온 전자제품 가격에 시쳇말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앞으론 해외 직구가 주말에 ‘이마트 가듯’ 보편화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황 교수는 “직구를 직접 경험해보면 알겠지만 해외 직구는 학습효과가 굉장히 크게 나타나는 분야”라며 “일단 직구에 대한 소비자들의 학습효과가 생기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구매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② 호갱 탈출
“그 제품원가 다 알고있다” 똑똑한 소비자 스마트쇼핑
이는 역으로 ‘호갱(호구고객)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국내 소비자들의 반발심리와도 연결돼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애플의 신형 스마트폰인 아이폰6를 개통하는 과정에서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을 무력화한 불법 보조금으로 호갱 논란이 촉발됐다. 자동차 역시 국내 제품이 해외 판매 제품보다 품질은 떨어지면서 가격은 더 비싸다는 호갱 논란에 시달리는 고질적인 분야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우리 수출기업들이 해외보다 국내 제품가격을 높이 설정하는 측면이 있었다”며 “한국 제품을 해외 직구로 더 싸게 사려는 국내 호갱 콤플렉스는 장기적으로 우리 수출기업들의 국내 가격 고가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해외 직구 열풍으로 국내 유통업계는 상당한 가격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해외 직구에 솔깃한 국내 소비자들 마음을 잡기 위해 전자제품, 의류, 식기 병행수입 제품을 중심으로 상시 가격할인에 나서고 있는 것. 정부도 해외 직구를 통한 수입 가격 인하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일반 수입업자가 해외 직접 구매를 통해 물건을 수입하는 병행수입 물품의 질도 덩달아 좋아졌다는 게 관세청의 판단이다. 정부는 ‘병행수입 물품=짝퉁’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수입업자가 적법하게 수입한 상품에 대해 정식 수입통관 사실을 표시하도록 하는 인증제를 도입했다.
해외 직구는 공급자 입장에서도 재고 관리, 오프라인 매장 관리, 특정국 소비자 취향 분석 등 제조·유통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조용수 LG경제연구원 뉴프론티어센터장은 “국가와 시장 간 경계가 사라지는 데다 기술 발달로 모바일 직구까지 보편화하면 직구 시장은 혁명적 수준으로 공급·수요 양 측면에서 메가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해외 쇼핑몰 사이트에서 한국어 지원 및 국내까지 직접 무료배송 등 다양한 서비스 공세를 펼치고 있는 점 역시 공급자들 간 경쟁이 소비자 편의 재고로 이어진 긍정적인 사례라는 설명이다.
다만 혁명적 변화에 뒤따르는 리스크 요인도 꼼꼼히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단적으로 국내 소비자들이 해외 직구를 통해 고가의 폴로 유아복을 저렴하게 구매하면서 국내 중저가 유아복 제조업체들의 존립 기반도 빠르게 침식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③ 득템 만족
“남들이 못사는걸 나는 산다” 고난도 쇼핑으로 우월감↑
국내 수입 브랜드에는 없는 디자인 등 다양한 제품을 선택하면서 얻는 심리적 만족감 역시 직구족(族) 증가의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신관호 교수는 “직구는 기본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구매행동인데 해외에서 직접 구매를 한다는 우월감과 희소성 있는 상품을 획득했다는 성취감은 직구 참여자와 시장 잠재력을 함께 키우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경기침체(리세션·recession)와 최신 스타일을 지향하는 소비자(패셔니스타·fashionista)의 합성어인 ‘리세셔니스타’가 탄생한 곳도 바로 해외 직구 사이트다. 여성 직장인과 신혼 주부를 중심으로 하는 리세셔니스타 직구족들은 불황 속 최소한의 비용으로 여러 정보를 취합해 꼼꼼히 비교하며 고가의 패션 상품을 ‘득템’한다.
이준협 경제동향분석실장은 한국 소비자들의 ‘스마트 파워’에서 직구 시장의 기하급수적 성장을 얘기한다. 그는 “어려워진 주머니 사정 속에 영어는 물론 일본어 등 언어 장벽 없이 디지털 감성으로 무장한 한국의 알뜰주부들이 쇼핑 루트를 과감히 전환해 소비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가족도 최근 3~4년간 자녀 옷 등을 해외 직구로 충당해왔다”며 “현 스마트한 주부층과 중산층 위주의 직구 수요가 저소득층 저변으로 확산되면서 향후 직구 시장은 7조~10조원대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용수 뉴프론티어센터장 역시 “직구 시장은 상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재미와 다양한 선택권이 보장된다. 인터넷 검색 능력 등 한국 소비자들의 스마트한 역량과 결합해 직구 시장의 양적·질적 팽창이 빠르게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똑똑한 소비자들로 인해 유럽 등 해외 명품업체들의 콧대가 낮아질지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유럽 명품의 경우 한국 시장을 아시아 가격정책의 ‘테스트베드’로 삼고 고가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른 관세 인하 효과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경제 전문가는 “최상위 명품의 경우 재고가 남더라도 이를 할인 판매하지 않고 전량 폐기하는 식으로 고가 정책을 유지해왔다”며 “당장 가격 정책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해외 직구 수요를 고려한 상품군 다변화 전략 등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재철 기자 / 김정환 기자]
출처: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1478635